미친 존재감
1.
자고 일어나니 휴대폰이 벽돌이 되어 있었다.
완전한 벽돌은 아니고, 알림등과 홈버튼 양옆 키에 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전원키, 홈버튼, 볼륨 버튼을 눌러봐도 액정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배터리 일체형이라 배터리를 뺄 수도 없었다.
인터넷에서 알려주는 강제종료(볼륨 내리기 버튼 + 전원버튼 7초 이상 누르기)도 해봤지만 역시 묵묵부답.
결국 AS센터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2.
AS센터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버스로 2정거장, 걸어서 25분 정도?
그런데 문제는 '감'으로만 위치를 안다는 것이었다.
감으로 버스를 타고, 감으로 있을만한 곳에 내렸는데... 왠열.
사방을 둘러봐도 AS센터가 안 보였다.
평소에는 이럴 때 지도앱을 켜서 검색하면 딱 나오는데.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휴대폰에서 검색 한번만 해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너무 민폐같았다.
일단 옆에 계시는 노점상 아주머니께 물어봤는데 모르신단다. 대신 앞에 부동산에 물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동산 아주머니는 정확한 길을 알려주셨다.
1정거장을 지나쳐서 내렸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3.
연휴 바로 다음날이라 그런지, AS센터에는 사람이 많았다.
대기 시간이 1시간이 걸린다고 하며, 안내원은 차라리 다른 볼일을 보고 있으면 다른 연락처로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1시간 반 뒤에 상담이 예정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문자로만 계속 연락했고, 왠지 오늘 보는 것에 대해 한번쯤 확인하실 것 같았다.
다행히 그분의 연락처는 구글 서베이로 받아놔서, 센터에 있는 컴퓨터로 구글 로그인을 하려고 했더니... 왠열.
낯선 기기에서 로그인을 하는 거라고 휴대폰 인증을 하란다.
차선책으로 메일 인증을 하라고 하는데, 그 메일은 비밀번호를 잊어서 못 들어갔다.(모바일에서는 자동 로그인이 된 상태여서 비밀번호를 몰라도 괜찮았다) 비밀번호를 바꾸려면 또 휴대폰으로 본인 인증을 해야했다.
젠장!
현대 사회에서 본인 명의의 휴대폰은 신분증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4.
결국 집에 다시 돌아와 내담자분께 PC카톡으로 연락을 취하고(적다보니 그 센터 컴퓨터에 카카오톡을 깔면 되는 일이었다...)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다행히 나는 늦지 않았는데, 내담자분께서 20분 정도 늦으셨다.
책을 읽으면서 기다리는데, 이렇게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경험이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휴대폰으로 늦으면 늦는다고, 무슨 일이 생겼으면 생겼다고 알리기 때문에 이렇게 언제 오나- 밖을 내다보며 기다리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5.
우여곡절 끝에 휴대폰을 다시 찾았고, 다행히 그 사이에 놓쳤던 중요한 연락은 없었다.
비록 한나절이었지만, 휴대폰이 제 기능을 못할 때 얼마나 쓸데없이 불안한지, 내가 휴대폰에 얼마나 종속된 인간인지 새삼 깨달았다.
스마트폰 덕분에 참 많은 일이 가능하지만,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할 때 얼마나 타인과의 소통에 취약해지는지도 알았다.
무서운 존재감을 지닌 녀석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