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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Mar 18. 2017

나의 여행에게 묻다

정지우,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1.

2014년의 어느 초겨울이었던 것 같다.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1년 동안 2개월씩 6 대륙에 살아보면 흥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카페에 있는 냅킨에 타임라인을 그리며 친구한테 설명하면서, 생각은 실체가 있는 ''이 되었다.

부모님을 포함한 여러 명에게 얘기하면서 구체적인 '계획'이 되어갔다.


2016년의 여름, 두 번째 회사를 다니다 우울증이 재발해 도망치듯 퇴사를 하고 어느 정도 상태가 괜찮아졌을 무렵, 나는 이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모아놓은 약간의 돈이 있었고, 가족과 남자친구도 다녀오라 했다.

그렇게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시작으로 인도와 유럽의 한 도시를 2개월씩 6개월 정도 다녀오자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는데...


그때 다니던 정신과 선생님한테 질문을 받는다.

왜 여행을 가려하느냐고.
너의 여행은 도피가 아니냐고.


아니에요.
제 여행은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꼭 하고 싶은 일이에요.


라고 대답은 했지만 마음 한편 얻어맞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벙쪄서 병원을 나와 무작정 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여행에 수많은 환상을 투사하고 있을 때, 여행은 내 삶의 문제를 모두 해소해 줄 만병통치약으로 왜곡된다. - 27p
동경만큼이나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는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탈출'의 욕망이다. - 28p
자유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보면 죽음을 향한 욕망과 닮아 있다. (...) 세상 어디에 가도 그러한 의무들, 즉 '현실'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건 다만 '일시적인 도피'로만 가능할 뿐이다. 여행은 일시적 탈출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효과를 불러온다. - 29p


이 문장들을 만나면서, 나는 내 여행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을 위해 가는 여행인지? 애매했다.

사실 이건 애매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내가 즐겁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호주에 대해 알아보면서 시드니든, 멜버른이든, 퍼스든, 브리즈번이든 나에게는 그냥 다 똑같아 보였다.

시뮬레이션을 돌리다 보면 낯선 여행지에서의 괴로울 것들만 보였다. 집 구하는 것, 일자리를 구하는 것 등을 굳이 먼 타국에 가서 해야 할 이유가 명료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매우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현실에 다시 발을 딛고 새로운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애초에 3년 직장생활을 하고 떠날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곧 그 3년이 다가온다.

나의 현실은 떠나기도 어렵지만, 안주하고 싶지도 않다.


2.

흔히 '자유'는 모든 조건과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어떤 '순수한 상태'라고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자유를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는 자기가 어떤 현실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
자유롭다는 것은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장악하며 수정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31p


3년 뒤에 떠날 것을 꿈꾸던 나는 꽤 행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꿈이 다시 현실이 되어 실천에 옮기려 했던 즈음에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꿈이 없어져버린 지금은...

현실과 꿈의 접점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나 자신을 새롭게 장악하는 방법이 꼭 여행을 통해서는 아닐 것이다.

여전히 떠나고 싶을 때가 많지만, 붙어 있는 현실도 나쁘지 않다.

현실에 오래 붙어있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참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 하나의 도전이라고 부르고 싶다.


3.

그러나 그 모든 건 진정한 성장이나 특별한 체험의 과정이기보다는, 마치 특정 의무를 부여받고 성실히 해내는 착한 모범생의 실천에 가까워 보인다. 기대했던 놀라운 우연도, 남다른 경험도, 삶을 바꾸거나 자아를 다시 태어나게 한 사건도 없이 여행은 종료된다. '배낭여행에서 무엇을 얻었고 배웠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미묘하고 신비한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여행에서 특별히 배웠다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48p


2주 이하의 짧은 여행에서 굳이 뭔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현실을 떠나 꽤 큰 기회비용을 부담하면서 여행을 떠난다면 한 번쯤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떠나는지.


4.

매우 선별적으로 발췌해서 마치 이 책이 여행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저자는 여행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행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는다.


조금 과장한다면, 그것은 '삶의 혁명'으로서의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현실에 적응할 힘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 방식으로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삶에 대한 주인이 되는 과정을 걷게 된다. (...) 그것은 여행이, 그 속에 내재된 힘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여행이 창출하는 존재방식이 우리 삶을 바꾸어 내고 구해 주리라는 믿음이다. - 34p


여행에서도, 책에서도,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끝>


*이 책의 모든 인용구는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정지우, 우연의 바다)에서 인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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