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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Lizzy Mar 01. 2017

일에 대하여

제현주,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나 역시 일해온 시간만큼 내 안의 수많은 모순된 욕망과 씨름해왔다. 일을 좋아하지만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돈을 잘 벌고 싶었지만 돈이 아니라면 의미 없을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배울 것이 있는 일에 구미가 당겼지만 너무 어려워 실패가 뻔한 일은 싫었다. 모두에게 열심을 다그치는 세상에 화가 나지만 더 잘하고 싶어 자신을 다그치기도 한다. 모순투성이 마음인 걸 안다. 그 속에서 균형의 지점을 찾아내려고 여전히 씨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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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회사에서 하는 일의 속성은 하라니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은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선택하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나와 이 일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생각하면서 일하지 않으면 자꾸 딴생각이 든다. 나는 왜 이 일을 하지? 돈 벌기 위해서 하나? 그럼 돈 더 잘 버는 곳은 어디 없나? 야근 덜하는 곳은 없나? 등등.


그래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뉜다. 자본의 착취 전략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가닿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은 일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해 슬퍼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지 못해 슬퍼한다. 다른 한쪽에선 일을 향한 열정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구가 마치 명품 가방을 사려고 돈을 모으는 마음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에 열을 올리는 것만으로 '착취하는 자본'의 한편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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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향한 열정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을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사람들을 비난한 적은 있다. 작년에 한 달 정도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열심히 일하는데 나는 전혀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 그들을, 그곳의 시스템을 참 많이도 욕했다.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욕구를 명품 가방 사는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착취하는 자본의 한 편이 된다는 생각은 종종 든다. 내가 열심히 일해봤자 남의 꿈을 실현시켜주는데 일조하는 건 아닌가? 하지만, 처음부터 그 꿈에 동참하지 않을 거라면 왜 그곳에서 일하길 선택하는 걸까. 뭐, 애초에 선택권이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나.


(미생의) 오 차장 같은 이가 보이는 열정 앞에서 우리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며 죄책감을 강요당한다. 일이 곧 자기 자신인 사람 앞에서 우리는 초라함을 느낀다. 일이 돈벌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하는 자신은 그 앞에서 속물이거나 게으름뱅이, 현실과 타협한 비겁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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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이런 비교를 많이 하느라고 소모적인 감정을 많이 느꼈던 때가 있다. 지금도 아예 안 한다고, 앞으로도 완전히 안 할 지는 모르지만 열정의 화신 앞에서 초라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나는 그와 다르다고 선을 긋거나, 열심히 좇아가려고 뛰어가야 하는 걸까.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듯, 일이 놓인 조건을 직시해야 한다.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큰일 날 것 같은 집착 또한 버려야 한다. 그런 집착은 일하는 우리를, 그리고 결국은 일 자체까지 망치기 마련이다. 언제고 떠날지 모르니, 발을 반쯤만 걸친 태도도 답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일이 주는 최고의 재미를 맛보지 못한다. 마음껏 사랑할 것, 그러나 객관성을 잃지 않을 것, 그 일이 아니더라도 어디서건 의미 있는 일을 또 찾을 수 있다고 믿을 것, 일의 성패가 당신의 가치를 말한다고 착각하지 않을 것. 건강한 연애에 대한 모든 원칙을 그대로 적용해도 크게 틀릴 구석이 없다. 결혼에 골인하느냐가 연애의 의미를 판단하는 유일한 준거가 아니듯이, 이 일을 평생 가지고 갈 수 있을지가 일에 마음을 다할 조건이 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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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시구가 생각나는 문단이다. 확실한 건 연애나 일이나,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고 애매하게 대하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꼴을 보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이라도 온전히 올인했다가 모든 걸 잃어보았다면, 이후에 또 그런 용기를 내는 것이 무섭다. 일의 성패가 나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닌데, 일과 나를 동일시할 만큼 열심히 했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어렵다.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없다고 고민하기 전에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차근차근 연습해나가야 한다. 내 안의 욕망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그 욕망들의 우선순위를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조금씩이나마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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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어디서 누구와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재미있는 일을 원한다면 나는 어떤 것에서 가장 큰 재미를 느끼는가?
나는 어떤 상황을 가장 견딜 수 없어하는가?
돈을 벌어야 한다면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그것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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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단을 읽고 나는 정말로 곱씹어보았다. 질문들에 곰곰이 생각해보고 대답해보았다.(대답이 바뀌기도 하니 정기적으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내 진짜 욕망을 이해하는 건 어렵다. 특히 우선순위로 따져보자면 더 어렵다. 내가 일에 대한 욕망의 기준으로 생각했던 건 다음과 같다.


연봉

통근 거리

같이 일하는 동료

업무 성격

회사 &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

업무 강도, 일의 양, 근로 시간

업무 난이도

성장한다는 느낌(커리어 발전, 이직 가능성)

재미

사회적 의미


회사를 하나만 다녀보았다면 지금 다니는 회사가 이 기준에 대해 10점 만점에 몇 점 정도 회사인지 평가해보는 것도 객관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기준들의 우선순위는 어떠한지, 각 기준의 점수는 어떤지 보면 내가 힘든데도 불구하고 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이유나, 아니면 다른 조건이 다 괜찮은데도 이상하게 불만족하는 이유 등을 알 수 있다. 여러 회사를 다녀보았다면, 각 기준에 대해 회사들을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때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그 일이 제 가슴을 뛰게 해요"라는 이유보다 훨씬 오래가는 동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일을 일상을 이루며, 일상의 매 순간 뛰는 가슴만을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오래가는 동력은 결국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게 만들어주며, 잘한다는 것은 똑같은 일을 훨씬 더 좋아할 수 있는 조건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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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 일을 계속한다면 그건 흔히들 말하는 '초심'이나 가슴 뛰는 열정 때문만이 아니다. 싫은 부분보다 좋은 부분이 아주 조금 크기 때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현실의 필요나 사람에 대한 책임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숱한 의심의 순간들을 지나 그 일을 정말 잘하게 된다면 일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애초에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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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분도 "가슴 뛰는 일은 개나 줘버려요. 좋아하는 일 한다고 매 순간이 행복한 건 절대 아니에요. 힘든 건 똑같아요"라는 말을 했었다.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세 번째 회사에 입사하기 전, 27살의 나이에 2년 정도 일했고 모아둔 돈도 조금 있던 나는 한 1년 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한동안 여러 명한테 말한 것처럼 세계여행을 갈 수도 있었고, 좋아하는 글쓰기만 주야장천 하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실제로 글쓰기는 해보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막상 글 쓰는 백수가 되니 가슴이 뛰기는커녕 그 많은 시간이 참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난 다시 날 필요로 하는 한 회사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앞으로도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러면서도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직은 내 일을 정말 잘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애초에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일의 즐거움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문득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있다.


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좋은 사람들과 협력하는 게 좋아서, 리서치가 좋아서, 대의 속에서 일하는 게 좋아서 지금 회사에서 일한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통근 시간이 싫고, 그 외 기타 소소하게 싫은 것들도 있지만 싫은 부분보다 좋은 부분이 크다.


3월 말이면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 정직원으로 일한 지 꼬박 3년이다.

3년 일한 것 치고는 이직이 잦아 3년차 병은 좀 늦게 올 것 같다.

현재 나의 좌표는 그러하다.

고민은 계속될 것이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


*이 책의 모든 인용구는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제현주, 어크로스)에서 인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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