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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Dec 17. 2016

창의성에 대하여

최혜진,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1.

흔히 그림책은 어린아이들만을 위한 장르로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러했는데, '에디터C 최혜진'이라는 이름으로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작가님의 글을 읽고 그림책이 어른에게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어린이 영어교육에 대한 일을 하면서 업무 때문에 영어 동화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데, 알면 알수록 재밌고 기발한 그림책은 참 매력이 많은 장르다.

최혜진 작가님 역시 특정 계기로 '그림책'이라는 장르와 사랑에 빠지고,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림책 창작자들이 발휘하는 놀라운 창의성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책은 그녀가 선정한 10인의 작가들이 가진 창의성의 뿌리를 알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묶은 책이다. 브런치에도 여전히 글이 남아있지만 깔끔하게 편집된 종이책으로 읽으니 새삼 스크린을 통한 읽기 경험이 종이를 통한 읽기 경험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훨씬 책 읽는 경험이 향상되는 느낌을 받았다.


애초에 인터뷰의 주요 목적이 그림책 작가가 가진 창의성이니만큼, 책을 읽으면서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창의적인 사람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책 속의 인상 깊었던 구절을 중심으로 그 생각을 공유해보려 한다.


2.

상상력은 어떤 모양이나 형상을 생각으로 그려보는 능력을 의미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상상력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반면 창의력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이 하늘을 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려보는 게 상상이고, 그 상상에 한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실현해내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게 창의다. 창의는 해결하고 싶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만, 상상에는 결승점이 없다. - 40페이지


창의력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은 많아도, 상상력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은 없다. 때로 창의력 안에 상상력도 포함되어서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 결과와 목표를 위해 창의력이 필요한 세계에서는 상상력에 가까운 창의력을 경시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정리된 표현을 보니 창의력은 애초부터 참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상상력은 텍스트보다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걸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상상력이 좋은 걸까. 일단은 전자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 세르주 블로크에게) 부모님이 물려주신 최고의 자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매일 정육점으로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규칙적으로 일터로 나가 일하는 것의 의미와 무게감을 배운 것요.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기복 없이, 대단한 기대감이나 불안감 없이, 어제 노력했던 일을 오늘 또 해보는 태도. 그건 예술가에게도 꼭 필요한 태도거든요. 사실 창작 활동에서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마음에 드는 선 하나가 나올 때까지 똑같은 짓을 계속해야 하는데 그걸 지겨워하거나 진도가 안 나간다고 좌절하면 성장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140~141페이지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고 맞이한 첫 주말에 느꼈던 진한 피곤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회사를 다니면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 생활을 반복해온 아버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자는 이렇게 규칙적인 출근이 산업사회의 폐해이자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이라 비판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현재의 일터는 대부분 규칙적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고 그 반복을 계속하는 것이 삶의 무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왠지 정해진 일과가 없을 것 같은 예술가는 그런 무게에서 자유로울 것 같지만 - 실제로 그런 예술가도 있겠지만 - 창작 활동 역시 반복이라는 답변을 보면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노력은 어떤 분야든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르주 블로크) 전 창의성이 그저 무언가를 할 용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스스로에게 무언가 해보는 것을 허락하는 마음, '왜 안 되겠어' 하는 생각, '실패해도 괜찮아. 별거 아냐'라고 말해주는 자세. 이것이 창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유일한 차이예요. - 145페이지


무언가를 할 용기가 창의성의 의미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창의성의 시작이 작은 용기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첫 발자국. 보이지 않는 시선과 내 안의 검열관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나아가게 밀어주는 힘.


'결점과 함께 일한다'라는 표현은 벵자맹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그가 가진 받아들임의 자세를 잘 설명한다. 부족함과 흠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완벽함'이 아니라 자신의 본바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온전함'이 창의성의 기본이라는 생각. - 165-166페이지


어디선가 인생의 목표를 행복(Happiness)이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에 두자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온전함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행이나 부족은 나를 더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가진 글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완벽한 데서 오는 아름다움은 분명 존재하지만, 부족함과 함께 존재하면서 울림을 주는 아름다움 역시 분명 존재한다.


(벵자맹 쇼) 뭔가를 창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재능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라는 의지라고 생각해요. 적당히 눈을 사로잡는 창작물은 많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작물은 많지 않아요. 자기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는 마음과 의지가 가장 필요한 재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죠. - 181페이지


(에르베 튈레) 창의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넓혀가는 능력이 있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도서관에서 필요한 책을 찾아다닐 수 있는 아이라면, 그 아이는 분명 창의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가지 않겠어요? - 202페이지


(안 에르보) 시인이 하는 일이 뭘까요? 저는 '답할 수 있게 생각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즉, 관점에 대한 이야기죠. 자기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 관점을 바탕으로 필요한 정보와 불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일,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 이런 것들이 창의성 아닐까요. - 233페이지


위 세 가지 답변은 공통적으로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관점은 기준이자 잣대이다. 평가를 위해 작동하기도 하지만, 이해와 감상을 위해 작동하기도 한다. 관점은 어느 순간 발견해 고정해놓고 쓰는 것이 아니다. 관점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며, 죽을 때까지 탐색하고 보완하고 벼려야 하는 것이다. 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이 항상 누군가의 공감과 이해를 사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 대상이 설혹 나 혼자만이라도 나만의 관점을 가지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온전한 나의 세상을 내면에 가질 때, 바깥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3.

이 책에 대해 해쉬태그를 달라고 하면 #그림책 #창의성 말고도 #육아라는 태그를 달고 싶을 만큼, 아이는커녕 결혼도 안 한 나에게 '나중에 아이를 기른다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목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클로드 퐁티는 한국의 부모들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급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나서서 대비하는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려움 속에 있는 아이를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는 것도 물론 나쁩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게 미리 다 방지해주는 것도 좋지 않은 방식이에요. 아이가 자기 느낌을 가져볼 기회, 진짜 세상을 배울 기회를 뺏는 거니까요. '우리 애가 이렇게 컸으면' 하는 욕심 때문에 미리 나서서 처리해주는 거라면 더욱 위험하죠. 그렇게 큰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행복한 어른이 되기 힘듭니다. 큰 집이나 비싼 자동차에서 겨우 존재의 이유를 찾고, 남을 미워하는 게 삶의 동력이 되는 불행한 어른이 됩니다. 바람직한 부모 자녀 관계는 각자의 생태계를 가진 두 개의 호수 같아야 합니다. 지하수로 연결되어 소통은 하지만 서로의 생태계를 존중하는 관계여야 하죠. - 118페이지


언젠가 만날(지도 모르는) 내 아이의 생태계를 꼭 존중해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는 다짐과 함께 글을 마친다.



<끝>

*이 글의 모든 인용구는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최혜진, 은행나무)에서 발췌하여 인용했습니다.




(덧붙이기)


그림책의 매력을 느끼기에 좋은(=제가 무척 사랑하는) 동화책 3권을 소개합니다. 인기 동화책은 대부분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데요. 뮤직비디오 감상하듯 한 번 봐 보시죠.


1) This is not my hat(내 모자 어디 갔을까?) by 존 클라센

https://www.youtube.com/watch?v=mA9Fq0ozX-8&t=2s 

- 그림책에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주인공들만 존재할 것 같은 편견을 없애주는 이야기. 큰 물고기의 모자를 훔친 작은 물고기의 생각이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고, 그림은 작은 물고기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된다. 나름 충격적 결말을 선사하는 스릴러(?) 그림책. 큰 물고기의 눈의 변화를 관찰하는 게 핵심.


2) Un livre(Press here/책놀이) by 에르베 튈레

https://www.youtube.com/watch?v=Kj81KC-Gm64 

- 그림책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어린이들에게 마법을 부릴 수 있는지 알려주는 천재적인 책.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지 그저 감탄이 나올 뿐.


3) The day the crayons quit by 드류 데이월트

https://www.youtube.com/watch?v=xkMmfIwOix8

- 크레파스가 파업을 하다니. 어떤 크레파스는 너무 많이 쓰인다고, 어떤 크레파스는 너무 적게 쓰인다고 주인 아이에게 하소연을 하는 절절한 탄원(?)을 한다. 쉽게 생각하기 힘든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림책의 매력을 잘 살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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