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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Lizzy Dec 19. 2017

시인의 눈

박연준, <소란> 

1.
표지처럼 담백하게 아름다운 책이었다. 
시인이 산문을 쓰면 이렇구나.... 싶었다. 
산문인데도 운율이 살아 있었다. 

이름이 투박해 남자 작가일거라 생각했는데, 여자 분이었다. 남편은 장석주시인이라고 한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이렇다는 걸,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2.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사랑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 자가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자다. 

먼 훗날 당신이 많이 아파 내 무릎이 꺾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못 이겨 꺾이듯 그런 것은 아니면 좋겠다. 오히려 새벽을 생각하는 아버지가 저문 언덕에서 구절초 무리를 보려고 숙인 모가지처럼. 딱 그 모가지처럼 꺾였으면 좋겠다. 그때가 되면 내 양 무릎을 당신 쪽으로 내놓고, 꺾인다는 것을 기꺼워할 수 있을까?
- 20페이지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엄마 아빠 죄송해요ㅠㅠ)을 생각하면서 읽었더니 괜시리 눈물이 핑 돈다. 사랑하면 무릎을 꺾는 게 아니라, 무릎이 꺾인다는 것.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아픔에 같이 슬프고, 절망하는 것. 


하필이라고 말을 하고 보니 참 좋네요. 어찌할 수 없음, 속절없음이 사랑의 속성일 테니까. 사랑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싶네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할게요. 
- 32페이지


예전에 봤던 어느 드라마였던가, 책이였던가에서 봤던 말이 생각난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야 할 수 천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 그냥, 어찌할 수 없어서. 


3.

가구나 장신구, 기계 따위는 30년 정도 지나면 무리 없이 골동품 대열에 낄 수 있다. 음악이나 영화, 책도 30년 묵으면 희끗한 분위기를 풍기며 반 고전 반열에 오를 수 있다. 30년 전에 담근 술이 있다면 그 술은 보약 대접을 받는다. 한눈팔지 않고 30년 동안 같은 일을 해온 사람은 전문가나 장인, 달인 취급을 받는다. 그렇다면 인생은 어떨까? 30년 동안 살아온 인생은 골동품 대열에 낄 수 있을까? 어림없다.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스테인'에 나오는 구절을 빌리자면, "더이상 성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면서도 아직은 노화로 나빠지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간신히 폭이 좁은 터널 하나를 지나온 얼굴로 서 있는 나이가 서른이다.
- 39페이지


그러게나 말이다. 물건이나 예술은 30년만 지나도 뭔가 의미를 지니는데, 인생 30년은 정말이지 어림없다. 아직 노화는 시작되지 않았으나, 노력하지 않는 한 성숙도 어렵다. 


4. 

보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다르다. '바라보다'라 함은 시선을 떼지 않고, 공들여 바로 본다는 것이니까.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고 한곳을 선택한다는 뜻이며, 눈과 마음과 몸이 합작하여 (대상을) 바라 (대상을) 보는 일이다. 
- 43페이지


'바라보다'라는 단어를 '바라+보다'로 떼어서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무엇을 바라고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를 선택해 거기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동물에게 똥은 '싸는 것'이 아닌, '두고 오는 것'이다. 두고 온다는 것은 가해자의 입장이고 사실 당하는 똥의 입장에서 보면 똥은 홀로 남겨진, 버려진 존재가 된다. 버려진 똥에게서는 무언가 구슬픈 냄새, 한 번 맡으면 아삼아삼하게 다시 생각나는 냄새, 버려진 것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난다. 
- 59페이지


이 문장 역시, 시인의 관점이란 이런 것이다!를 알려주는 문장 같다. 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싸는 게 아니라 두고 오는 것이고, 버려지는 것이라니. 안도현 시인의 시 '스며드는 것' 때문에 게장을 못 먹는 분이 있다던데, 이 문장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하면 똥도 못싸게 되려나.


5.

나는 어느 순간 슬픔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까지 갖게 되었다. 슬픔을 내 인생에서 추방시키고 싶었다. 슬픔은 슬픔이란 이유만으로 유죄였다. 회사를 다녀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보란 듯이 평안한 얼굴과 마음가짐으로 웃고 싶었고, 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돈을 벌며 살기 위해 시간을 쓰고 싶었다. 
- 183페이지


슬픔은, 나약함은, 우울증은 부정적인 걸까? 분명 피하고 싶은 것들은 맞다. 그 존재만으로 유죄일 수도 있다. 


슬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것이고, 힘없는 자들을 가여워하지 않을 것이며, 나누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슬퍼하지 않으면 더이상 어떤 시나 노래도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
- 185페이지


역시 시인답게 끝까지 슬픔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궁금해진다. 슬퍼하는 자는 정말 복이 있을까? 
바라건대, 그러기를. 


*이 글의 모든 인용문은 <소란>(박연준, 북노마드)에서 인용했습니다. 



글/김명선(리지블루스 책방지기)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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