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트래인저 댄 픽션(Stranger than fiction)>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헤롤드 크릭은 강박증 수준으로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는 국세청 직원이다. 그의 출근 준비는 이를 닦는 횟수까지 정해져 있을 정도로 정해진 시간과 시퀀스에 맞춰 진행된다. 손목시계는 그렇게 살아가는 헤롤드를 가장 측근에서 관찰하는 존재로 지내왔다.
그리고 어느 수요일, 손목시계는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2.
영화는 첫 4분 동안 위 1번에서 언급한 내용을 헤롤드의 영상과 한 여자의 나레이션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손목시계가 모든 것을 바꾼 수요일, 이 나레이션이 주인공 헤롤드에게 들리기 시작한다.
오직 헤롤드에게만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더 무서운 건 이 여자가 헤롤드의 마음 속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서류 정리를 할 때 내는 소리가 마치 바닷가에서 들리는 파도소리 같다고 느꼈던 생각부터 세금 추징을 하러 찾아간 안나 파스칼을 보면서 그녀와 자는 상상을 하는 것까지, 목소리는 헤롤드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 이 황당한 사건이 믿기지는 않지만 딱히 이유도 해결책도 모르던 헤롤드는 어느 날 목소리가 '그는 자신의 죽음이 곧 임박했다는 것도 모르고...'라는 말을 듣고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신경정신과 의사는 헤롤드가 정신분열이라고 하지만, 헤롤드는 그게 아니라 자기가 뭔가 이야기의 주인공같다고 이야기하고, 의사는 '그럼 문학 관련 전문가라도 찾아가보시든지'라고 지나가는 말을 던지고 헤롤드는 이를 덥석 물어 문학 교수를 찾아간다.
교수는 처음에 헤롤드를 믿지도, 도와주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방을 나가려던 헤롤드가 "그 목소리가 '그는 전혀 모르고...(Little did he know...)'라고 했단 말이에요"라고 하자 "뭐? Little did he know라는 문장을 썼단 말이야? 난 그 문장으로 박사학위를 땄고 어떤 학기는 그 문장에 대해서만 강의한 적도 있어"라고 하며 갑자기 적극적인 헤롤드의 조력자가 된다.
교수와 함께 헤롤드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신화인지 현대 소설인지, 비극인지 희극인지 등을 찾아나간다. 그러면서 단조로운 일상을 살던 남자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생각만 하던 기타 배우기를 시작하고, 처음에는 악연으로 시작했던 파티셰 안나 파스칼과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등 충만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의 방에서 우연히 작가 캐런 아펠의 TV 인터뷰를 보고 그녀가 바로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게 되는 헤롤드. 교수는 그녀가 반드시 주인공을 죽이는 작가라는 것을 알려준다. 은둔형 작가이지만 헤롤드는 국세청 직원이라는 공권력(?)을 활용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마침내 목소리의 주인공인 캐런 아펠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3.
섬세하고 예민한 작가 캐런 아펠은 10년 만에 내놓는 신작 소설 '죽음과 세금'을 준비하면서 주인공 헤롤드를 어떻게 죽일지 계속 고민한다. 개연성과 메시지를 모두 가진 죽음의 방법을 고민하던 캐런은 마침내 방법을 찾아내고 대충의 얼개를 짠 뒤 타이핑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때, 믿기지 않게도 자신의 작품 속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던 헤롤드의 전화를 받게 되고 고민에 빠진다.
캐런은 헤롤드에게 대충의 결말이 포함된 원고를 주고, 헤롤드는 이를 교수에게 준다. 작품을 읽은 교수는 요근래 나온 영문학 작품 중 최고이며, 주인공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헤롤드에게 전한다. 헤롤드 역시 작품을 읽어보고, 캐런에게 달려가 자신은 문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좋은 작품인 것 같다고, 그리고 자신도 주인공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겠다며 원래대로 작품을 끝마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헤롤드는 예정된 자신의 죽음을 수행한다.
캐런 아펠이 준비한 헤롤드의 죽음은 모든 게 바뀌었던 그 수요일, 멈추었던 손목시계를 3분 빠르게 맞췄던 게 원인이었다. 시계 때문에 3분 일찍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있던 헤롤드 앞에서 자전거를 탄 어린이가 도로 쪽으로 넘어지고, 그 아이를 구하다가 마침 도착한 버스에 치여 죽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버스에 치였다.
4.
하지만 헤롤드는 죽지 않는다. 마지막에 캐런이 마음을 바꾸어 결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교수는 캐런에게 바뀐 결말 때문에 작품은 몇 년간 나온 최고의 영문학 작품에서 볼만한 범작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캐런은 괜찮다(It's fine)고 말한다.
바뀐 결말에 대한 캐런의 나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그리고 그녀의 소설은 끝을 맺는다.
"때로 우리가 두려움과 절망을 느낄 때
판에 박힌 일상에 빠질 때
희망을 잃고 비극에 빠질 때
우린 달콤한 쿠키를 주신 신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쿠기가 없더라도
피부에 닿는 친근한 손의 감촉에서 여전히 안식을 찾을 수 있다.
혹은 친절한 행동에서
혹은 미묘한 격려에서
혹은 사랑을 담은 포옹에서
혹은 위로에서
병원 침대는 물론 코마개, 아직 먹지 않은 빵, 부드럽게 속삭이는 말, 꿈에 그리던 기타
그리고 어쩌면 소설에서도.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두 기억해야 한다.
뉘앙스(nuances), 예외(anomalies), 미묘한 차이(subtleties)와 같이 우리가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훨씬 크고 고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우리의 삶을 구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로 그런 일들이 많다.(It really happens to be true)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손목시계가 헤롤드를 구했다."
5.
원래의 결말에서 헤롤드는 손목시계 때문에 죽을 운명이었다. 물론 부주의한 버스 운전 기사, 갑자기 뛰어든 어린이 모두 그의 죽음에 원인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3분 일찍 맞춘 손목시계가 헤롤드를 그 자리에 있게 했던 것이니까.
바뀐 결말에서 헤롤드는 손목시계 때문에 살게 된다. 버스에 치이는 사고에서 오른팔 동맥이 끊어져서 사망할 뻔했지만, 손목시계 파편이 동맥을 차단하면서 출혈이 작아져 살게 된 것이다.
어떤 결말이든 헤롤드의 운명은 손목시계라는,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어떤 것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헤롤드의 죽음과 상관없이 이 이야기는 우리가 크게 신경쓰지 않던 사소함이 사실은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논한다.
주인공의 죽음은 어떤 이야기든 가장 중요한 사건에 속한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 결정하고, 결말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킨다.
새드엔딩은 강력한 여운을 남기고, 이 비정한 세상에서 진짜 일어날 것 같은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해피엔딩은 읽을 때는 행복하지만 큰 여운은 없다.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극도로 높은 확률의 거짓말이다. 이야기를 어느 정도 뻔하게 만드는 구석도 있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고,
사소한 것들에 의해 상처받기 힘든 세상을 계속 살아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희망은 달콤한 쿠키, 따뜻한 포옹, 보드라운 촉감과 같이 일상 속 사소한 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6.
이쯤에서 사소함과 사소하지 않은 것의 경계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 경계는 '인식'에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쿠키를 만드는 게 업인 사람에게 쿠키는 원래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쿠키는 가끔 생각날 때 사먹는 사소한 것이다.
하지만 고되고 지친 하루를 보내고 나서 먹는 갓나온 쿠키 한 조각은 때로 힘든 오늘을 함께했던 수많은 어둠을 흐트려뜨리는 마법을 부릴 수도 있다.
사소한 것들은 분명 사소하다.
웹툰을 보는 것은 출근하는 것보다 꽤 높은 확률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내 핸드폰 속 용량의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조금씩 쌓여가는 캐시가 차지하듯,
사소함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꽤 중요한 비중으로 삶 속에 존재한다.
여유없이 살아갈수록 때로는 사소함에 우선순위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야근 후 지친 택시 안에서 친구의 카톡에 답장을 하고
할머니와 일일드라마를 보며 경로당의 일상을 묻고
집앞 놀이터에서 밤하늘을 보며 그네를 타는 것은
사실 꽤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