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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Jun 07. 2018

인생의 결정권을 찾아가는 이야기

남연오, <인생이 거지 같은 사건들로 채워진 이유> 

1.

내가 운영하는 책방 '리지블루스'는 편의에 따라 심리상담서점, 작은 서점, 독립 서점이라고 부른다. 

심리상담을 하는 작은 서점이니까 심리상담서점, 작은 서점은 쓰는 데 거리낌이 없는데 독립 서점은 가끔 꺼려진다. 독립서점은 독립출판물을 주로 취급하는 서점을 의미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는 이 정의가 공식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내리는 독립서점의 정의는 '참고서를 팔지 않는 소자본 기반의 서점'이다.) 

 

리지블루스의 책 중 95%는 기성 출판사의 책이고 5% 정도만 독립출판물이다. 

이유는 내가 독립출판물에 대한 큰 애정이나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기성 출판물이나 독립 출판물이나 나한테 맞는 책이 있고 아닌 책이 있다. 그런데 그동안 독립출판물은 나에게 유효 타율이 좋지 않았다. 제목에 혹해서 샀는데 내용이 별로면, 그 책이 별로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독립출판물 전체에 대한 신뢰를 깎았다. 


2.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남연오 작가의 <인생이 거지 같은 사건들로 채워진 이유>.


독립출판물 중에서는 보기 힘든 소설이다. 

내가 소설을 많이 읽은 편이 아니고, 처음부터 기대가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참 잘 읽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 책을 잘 읽고 나니 독립출판물 자체에 대한 신뢰가 올라갔다.

앞으로 더 보석 같은 독립출판물을 발굴하고, 입고해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3.

'남연오'는 작가의 필명이자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다. 

책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소개가 적혀 있다.

- 무술년에 서른이 된 아내이자, 딸이자, 회사원으로 유쾌한 남편과 사춘기에 접어든 고양이와 생활하며 난생처음으로 글을 써 봄 
- 닫힌 마음이 빼꼼 바깥을 훔쳐보기까지의 긴 여정을 그려본 심장 떨리는 도전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스스로를 다독이는 마음으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4.

연오는 우울증 환자다. 

책과 서점을 좋아한다. 

은행이라는 안정적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거지 같은 상사 때문에 화가 났고 자신의 인생에 과하게 간섭하는 엄마 때문에도 화가 났다. 

남편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남편에게 너무 의존하는 스스로는 싫다. 

연오는 휴직을 하고, 도예를 배우고, 북클럽에 나간다.

흙을 만지고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다독여 나간다. 


연오를 그렇게 괴롭히던 상사는 다른 곳으로 갔다. 

이제는 회사가 버틸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오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작은 책방의 주인이 된다. 


5.

뭐 이런 이야기다. 

읽으면서는 나름 스펙터클한 면도 있었는데, 적고 나니 뚜렷한 줄거리 구조가 없는 건... 내 요약 능력의 한계였으면 좋겠다. 

아니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이런지도 모르겠다.

살아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인데, 남이 보기에는 밋밋한 CCTV 영상에 불과한. 


6.

혼자라는 감정만으로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음을 느끼는 사람은 흔치 않다. 연오의 진단명은 우울증이었다. 스트레스에 취약해서 감정의 붕괴가 잦고, 혼자의 힘으로 다시 기운을 끌어올릴 수 없는 병. - 23페이지 


우울증에 대한 좋은 설명이다.


우울증은 병이다. 어떤 임계치를 넘어선 이후에 혼자의 힘으로는 기분 조절을 할 수 없는 병, 모든 일이 버거운데 특별히 그럴만한 이유가 없어서 뇌가 그 상태에 붙잡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병, 무기력하고, 기분이 제멋대로고, 죄책감과 불안으로 뒤덮여서 예전에 즐거웠던 일도 더 이상 즐겁지 않은 병. - 73페이지


또 다른 좋은 설명이다.


나를 미워할 거다,라고 몇 천 번 방패를 세우고, 나를 떠나갈 거다,라고 몇 천 번 스스로를 향해 창을 찔렀던 연오는 정필의 따뜻한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꺽꺽 소리 내어 울었다. - 112페이지


정필은 연오의 상담 선생님이다. 연오에게 "나는 연오 씨 안 떠나요."라고 한다. 떠난다는 말은 연인 사이에서만 하는 말이 아니다. 친구도, 직장 동료도, 심지어 가족도 나를 떠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잘못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존재한다. 그러니 소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안 떠난다고 다독여주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큰 결정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대단한 무력감을 느낀 연오는 자주 잠을 못 이뤄 뒤척였고, 잦은 두통과 가슴 위에 바위가 얹힌 답답함에 계속 시달려가며 화병, 울화병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사주 따위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버리는 엄마가 너무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 126페이지


자기 인생에 대한 결정권이 없는 상태는 정말 무섭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만든 사람이 연을 끊기 힘든 사람이라면 괴로움은 배가 된다. 연오는 남자 친구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에게 보란 듯이 가출해 남자 친구와 동거를 시작하고, 결국은 엄마의 항복을 이끌어낸다. 멋지다, 남연오.


연오가 다시 일어나려면 '단 한 번의 승리'가 필요하다고 온은 생각했다. 계속 패배만 해서는 사람은 재기할 수 없으니까. - 134페이지


온은 연오의 오랜 친구이다. 온이 의미하는 '단 한 번의 승리'는 연오의 뜻이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연오의 대나무 숲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단 한 명의 내 편만 있으면 됐는데. 사람들은 외면했다. 손을 끝까지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나보다 먼저 지쳐 나를 떠나갔다. 그런데 그냥 친구들하고 술 먹고 욕하고 풀라고? 직접 와서 해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 139페이지


누군가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는 것, 답이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친구라는 이름에게 지우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다. 


*이 글의 인용구는 모두 <인생이 거지 같은 사건들로 채워진 이유>(남연오, 독립출판)에서 인용했습니다. 


<끝> 



글/ 김명선

- 수원에서 심리상담서점 <리지블루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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