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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Dec 10. 2016

결함 있는 나를 받아들이기

기준이 너무 높은 그대

1.

내가 완벽주의자라는 걸 깨달은 건 초등학생 때였다.

두세 명의 친구와 둘러앉아 이야기하다가, 내가 어디서 심리 테스트 결과 같은 걸 읊으면서 "내가 완벽주의 경향이 있대"라는 말을 했고, 주위 친구가 "응, 그런 거 같아"라고 했다.

별로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그 친구 역시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내가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몇 가지 계기를 통해 나에게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완벽주의를 추구한다고 진짜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 대해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고, 완벽하지 못할 바에는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개인의 가치에 적용되면, "완벽하지 못한 나"는 존재할 가치도, 행복할 자격도 없다고 여기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2.

우울증에 걸린 나는 기본적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

학생일 때는 팀 프로젝트 모임에 빠지거나, 누군가와의 약속에 가지 못했고, 직장인이 되어서는 출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집중력은 낮아지고, 업무 퍼포먼스 역시 최상의 컨디션일 때보다는 안 좋아진다.


그리고 이렇게 부족한 나를 가장 책망하는 건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다.


이번 우울증 때는 거의 안 그러지만, 이전까지는 우울증이 심해 출근을 하지 못하는 날의 나는 잠든 시간이 아니면 꽤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차피 하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뭔가 맛있는 걸 먹거나 재밌는 것을 보는 등 제대로 "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책임을 제대로 다하지 못한 나는 즐거워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책임에서 도망친 주제에 즐거워하는 나를 누군가가 욕하고 비웃는 장면이 끊임없이 상상되었다.

누군가 그 연결고리를 끊어주기 전까지는, 아니면 기적적으로 스스로 그게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그렇게 스스로 구덩이를 파서 절망으로 들어갔다.


힘들어서 도망쳤는데, 그 도망친 곳에서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3.

여름에 잠깐 받았던 상담에서 선생님이 던졌던 질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우울증 때문에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고 남아 일을 했다면 어느 수준으로 일을 했을까요-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막연히 우울증에 걸린 나는 일을 못해, 이런 나는 가치가 없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구체적으로 도대체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이 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내가 발견한 것은, 그러한 상태의 나도 뭔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울증 때문에 못 가거나 늦게 가더라도, 나는 없는 것보다는 분명 나은 사람이며, 최상의 컨디션일 때만큼 멋지게 일하지는 못해도, 평범한 수준으로는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4.

평범함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위의 대답은 자기 합리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저 대답이 맞다고 믿고 싶다.


100%를 해내는, 100점을 맞는 내가 아니어도 충분히 가치 있다.

문제는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이고, 너무 높은 기준은 작은 나를 더 작게 만들어버린다.


우울증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조심한다고 확실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이만큼 해내는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굳이 칭찬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토닥여줘야 한다.


이걸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했다.

난 빌어먹을 100점을 너무 많이 받는 전교 1등이었고, 남들보다 잘하는 것에 너무 익숙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젠장.


5.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예전에는 낭떠러지라고 생각했던 곳이 막상 떨어져 보니까 좀 아프고 나면 일어날 수 있는 언덕이었다.


프랑스의 동화 작가 클로드 퐁티인생의 난관을 마주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인생의 난관에 좌절하지 않고 그걸 발판 삼아 성장하려면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장애물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도망가거나 맞서거나 빙 둘러 가거나... 해결책이 한 가지 모습일 거라고 믿지 마세요. 예전에 부모님과의 불화로 오랫동안 거식증을 앓다가 거의 회복되어 이제는 다른 환자를 돕는 여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그녀에게 거식증은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거식증은 회복으로 가는 과정이자 해결책이지요. 시간이 지나 더 이상 거식증에 기댈 필요가 없을 때 빠져나와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좌절이나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지 않게 하려면 '해결책은 하나가 아니다', '지금 내가 보이는 이 반응들은 당연한 건다', '난 과정 중에 있는 거다'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최혜진, 은행나무, 117페이지


나에게 우울증의 긍정적인 면을 보게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분이 있다.

끝없는 성취를 갈망하는 나에게 우울증이 과열되지 않게 브레이크를 잡아주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거식증이 누군가에게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한 방편이었듯, 우울증 역시 내가 끝없이 노력하다 산화되어 버리지 않게 방어해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우울증이 예쁘지 않다.

하지만 예쁘게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 있다.

나의 우울증도, 그 우울증과 함께 살고 있는 나도.


<끝>



글/김명선

- 에세이 <리지의 블루스> 독립출판

- lizzyblues0330@gmail.com /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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