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나간 퓨즈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1.
엄마가 불면증에 걸리셨다.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지만 엄마에게는 큰 스트레스를 주는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잠을 자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다가 엄마는 신경정신과에 가셨다.
처음 약을 먹은 날은 매우 괜찮았다. 엄마는 오랜만에 푹 잠을 주무셨다.
하지만 엄마는 약을 꾸준히 먹기를 거부했다.
약이 뭔가 몽롱한 상태로 만드는 것 같다며, 약에 중독될지도 모른다며 가능한 약을 먹지 않고 잠을 이루려 노력하셨다.
안타깝게도 엄마의 불면증은 쉽게 낫지 않았다.
현재도 진행 중이며, 엄마는 매일 밤 오늘은 잠들 수 있을까 걱정한다.
나는 우울증, 엄마는 불면증.
모녀가 모두 안타까운 집안이다.
내가 엄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엄마의 말을 들어주거나, 가끔 엄마 옆에서 같이 자는 일 정도(우리 집은 주말 부부라 아빠가 주말에만 오신다).
그리고 정신질환 선배(?)로서 엄마한테 충고를 하는 것.
엄마, 이건 장기전이야. 약 꾸준히 드세요. 적어도 3개월은 걸릴거에요.
2.
네 번쯤 우울증을 겪으며 나의 패턴을 관찰하다 보니, 우울증을 시작하는 어떤 트리거(trigger)가 있다.
트리거를 관찰하며 왜 그 트리거가 트리거의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이건 상담을 통해 치료하는 걸 추천) 초보 정신질환자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어느 순간부터 트리거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원인이 있어서 힘들고, 그 일이 끝나고 나면 힘들지 않은 것은 병이 아니다.
그 원인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계속 힘들면 병이다.
엄마의 불면증은 A라는 사건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지금 엄마는 A 때문에 고통받는 게 아니다.
병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다.
엄마의 상태는 과전류가 흘러 퓨즈가 나간 상태와 같다.
더 이상 과전류가 없어도 한 번 퓨즈가 나가면 제대로 고치기 전까지 다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한 번 시작된 정신 질환은 제대로 치료하기 전까지는 계속된다.
정신 질환 치료의 가장 기본은 약물 치료이며, 이 약물 치료는 대개 최소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지속된다.
난 두 번째 우울증이 발병했을 때 거의 1년 가까이 약을 먹기도 했다.
정신 질환 약을 먹는 행동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약에 중독될까 봐, 또는 약 때문에 평소의 내가 아니게 될까 봐 두렵고
약을 먹을 때마다 내가 정신질환자라는 걸 인식하게 되는 것이 고통스럽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괜찮아졌다 싶으면 약을 먹지 않거나, 의사 선생님께 물어본다.
"선생님, 이 정도면 약을 끊어도 괜찮아지지 않나요?"
언제쯤이면 약물 치료를 멈출 수 있을까요?
3.
난 기본적으로 정신 질환에 있어 전문가를 신뢰한다.
초반에는 내 맘대로 판단해 약을 안 먹기도 했지만 이제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한다.
약에 대한 부작용이나 중독되는 느낌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내가 약을 먹을 때마다 느끼던 두려움과 고통은 없어졌다.
한 번 스위치가 내려가면 쉽게 올라가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이 병은 장기전이라는 걸 알기에.
꾸준히 약을 먹으면 내 퓨즈가 진화해서 좀 더 높은 스트레스에도 견딜 수 있게 용량이 커진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믿기에.
하루 좋아졌다고, 일주일 괜찮게 보냈다고 다음날도 괜찮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알기에.
4.
퓨즈가 나가지 않게 조심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퓨즈가 나갔을 때 장기전 태세를 갖추는 게 두 번째로 중요하다.
잠시 괜찮아졌다고 방심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했으면 좋겠다.
나도, 우리 엄마도,
그리고 이 글이 필요한 누군가도.
<끝>
글/김명선
- 에세이 <리지의 블루스> 독립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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