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 님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3인칭 주인공 시점>은 1시간의 1:1 인터뷰 진행 후 짧은 소설을 써드리는 프로그램입니다. 소설은 인터뷰이의 동의를 받아 익명화되어 배포합니다. 배포된 소설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1.
“이 과장님"
“...”
“과장님…?”
“...”
“과장님!”
“.... 네?”
“세 번을 불렀더니 답해주시네요. 여기 어제 지시하신 리서치 초안입니다.”
“어제… 제가 이걸 하라고 말했나요?”
“... 네"
김미연 대리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옆에 앉는 한선아 대리가 메신저로 잠시 커피 한 잔 하자고 해서 둘은 건물 내 커피숍으로 향한다.
“이 과장님 요즘 이상하지?”
“어! 완전! 몸만 같은 사람이지 영혼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내가 작년 가을부터 이 과장님을 관찰한 것에 따르면, 이 과장님은 현재 3개월마다 다른 인격이 되고 있는 것 같아.”
“헐… 설마 다중인격?”
“그 용어가 생각보다 복잡하더라. 다중인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들어봐. 작년 가을에 부장님이 과장님 엄청 쪼았던 시기 있잖아. 그 유니버스 프로젝트인지 뭔지 때문에 우리도 맨날 야근하고 그랬던. 그때 초반에는 과장님이 리드를 거의 못했어. 그러다가 부장님이 프로젝트 진척이 전혀 안 돼있는 걸 알게 되어서 우리 파트 사람들 다 지켜보는 앞에서 과장님한테 개쪽 주고 난 다음 날부터 사람이 바뀌었지.”
“그렇지. 완전 모두까기 인형이 되어 나타났잖아.”
“모두까기 인형이 아니라 모두까기 슈퍼맨이었던 것 같아. 그냥 사람들을 까고 다닌 게 아니라 갑자기 초능력을 발휘하면서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뭉개고 다녔잖아.”
“우리 그때 완전 똥멍청이 취급당했잖아. 자료에서 숫자 하나 틀리면 완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이런 실수를 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래. 심지어 부장님까지 까고 그랬잖아. ‘이건 회사를 위한 결정입니까, 부장님의 안위를 위한 욕심입니까?’ 다른 팀 사람까지 같이 있던 회의에서 그랬지.”
한선아 대리는 이 과장의 말투를 따라 하면서 상황을 재연한다. 김미연 대리는 웃느라고 정신이 없다.
“아... 진짜 웃겨. 똑같네 완전. 그 모드가 3개월 정도 갔나?”
“응. 그렇게 모두에게 미움받으면서도 업무 퍼포먼스는 폭발하더니, 갑자기 멍과장됐잖아. 맨날 회사 와서 멍만 때리고. 자는 것도 아니고, 딴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멍하니 뭔가를 생각하고 있더라고. 하루 종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모르겠어. 사람이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
2.
이정구 과정은 요즘 회사에서 업무를 최소한으로만 한다. 한 때는 평범한 사원이었고, 3개월 전까지는 불꽃 퍼포먼스를 내는 에이스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줬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미친 사람처럼 일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퓨즈가 나간 것처럼 힘이 빠졌다. 회사 갈 힘이 없어 지각하기 일쑤였고, 금쪽같이 어여뻐했던 딸을 봐도 기쁘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지고, 식욕도 뚝 떨어졌다. 회사에서는 하루 종일 무기력하게 앉아있고, 집에 와서는 잠만 잤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정신과에 찾아갔다.
“지금 증상은 우울증입니다. 다만, 3개월 전에 상태를 들었을 때는 조울증으로 의심됩니다.”
“조울증이요…? 조증은 거의 미친 것처럼 흥분하고, 웃고 막 그러는 거 아닙니까?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조증보다는 강도가 약한 경조증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아무튼, 그때도 정구 씨는 정상이 아니었어요.”
정구가 생각해도 이상했던 3개월이었다. 아이디어가 넘쳐나고, 두려움이 전혀 없고 자신감이 충만한 시기였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하루에 10시간 넘게 집중해서 일해도 끄떡이 없었다. 갑자기 초능력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주변의 사람들의 평범함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멍청해 보였다. 위아래 사람 상관없이 막말을 해댔다. 그때는 막말인지도 모르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어느 순간 공공의 적, 아니 공공의 사이코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스티브 잡스도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다는 기사를 떠올렸다. 범인들은 초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당당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평범한 이정구로 돌아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이너스 상태가 되었다. 능력도 마이너스, 기분도 마이너스, 관계도 마이너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최근 1년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멍한 상태에서도 생각을 해봤다. 초능력자가 되기 전에 정구는 부장에게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극한에 달하자 갑작스럽게 진화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진화가 아니었다. 일시적인 확장이었다. 평범한 크기였던 이정구라는 풍선이 갑자기 커졌다가 더 이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되었다.
스트레스의 영향으로 사람이 일시적으로 이상해지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초능력자가 되었다가 우울증 환자가 되지는 않는다. 정구는 왜 자신에게만 이런 증상이 닥쳤는지 답을 찾고 싶었다. 회사도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구는 책을 읽고,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정신과도 다니고, 예전에 직장 동료였던 사람이 퇴사하고 차렸다는 최면 치료소도 찾아갔다. 다들 조금씩 도움이 되었지만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책도 대부분 고만고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권의 책이 반전을 가져왔다.
3.
관계 심리학을 다룬 일본 작가의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라는 책은 ‘회피형 인간'이라는 개념을 다룬다. 읽는 순간 ‘이거다!’라는 느낌이 왔다. 책에서 묘사하는 회피형 인간의 특징이 자신과 대부분 일치했다. 직장 생활에서 성공하고 싶으면서도 과도한 부담으로 다가오면 벗어던지고 싶어 하는 이중적 모습이나, 인간관계를 표면적으로만 구축하고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특히 그러했다. ‘회피형 인간'이라는 프레임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정구는 어릴 때부터 뭐만 하면 ‘나는 못 해낼 거야, 그러니까 아예 시작도 하지 말자' 같은 생각을 자주 했다. 또한 친구들이랑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공상에 빠지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 우울에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심해서 후회를 많이 했다. 실패하더라도 부딪혀 가면서 경험을 쌓아나가는 게 중요한데, 그 과정이 두려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도망치다 보니 경험도 실력도 쌓일 리 없고, 이는 자괴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성향이 어릴 때부터 있어왔지만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경조증으로 발전하고, 경조증 기간이 끝나니 우울증으로 찾아온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왜 그러한지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정구가 자신을 ‘틀린 존재'가 아니라 남들과 ‘다른 존재'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정구는 변화하고 싶었다. 그동안 회피했던 일과 관계에 대한 문제에 직면해 해결하고 싶었다.
4.
제일 먼저 바로잡고 싶었던 것은 아내와의 관계였다. 정구와 아내 김수진은 정구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내커플이다. 정구와 수진의 가사 및 육아 분담은 결혼 초부터 5:5가 아니었다. 수진이 7, 정구가 3 정도를 수행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할 법도 한데, 수진은 그러지 않았다. 육아도, 가사 노동도, 회사 일도 평균 이상으로 잘 해내는 씩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구가 우울증을 앓고 나서부터 둘의 분담 비율은 99 대 1이 되었다. 수진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니는 딸 둘을 키우고 매일 아침 회사에 가기 싫어하는 남편을 챙기느라 육체적으로는 부서질 것 같았고 심리적으로는 무너질 것 같았다.
“정구 씨, 우리 얘기 좀 해.”
어느 일요일 오후 2시, 눈은 떴으면서도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는 정구에게 수진이 다가왔다.
“나… 정말 미쳐버리겠어. 언제까지 이렇게 나한테 다 내팽개치고 살 거야? 우리가 가족이 맞기는 한 거야? 애는 나 혼자 낳았어? 청소나 설거지는 바라지도 않아. 거실에 나가서 애들이랑 놀아라도 줘. 앉아있기라도 하라고.”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구한테는 그럴 기력이 없었다.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해할 수 없겠지만, 분명 할 수 있는데도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정구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 미안해”
“그 미안하다는 소리도 지겨워! 지겹다고!”
수진은 울면서 방을 나갔다. 정구는 다음 정신과 진료에서 의사에게 이 일을 털어놓았다. 의사는 수진을 한 번 병원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수진 씨, 정구 씨 때문에 힘드시죠?”
“네. 힘들어 죽겠어요. 우울증인지 뭔지, 저도 걸리면 안 되나요. 우울증 핑계대면서 저도 쉬고 싶네요.”
“수진 씨, 정구 씨를 우울증 환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교통사고가 나서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집에 있긴 하지만, 사실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한테 기대하는 게 뭐죠? 아무것도 없죠. 그냥 몸 관리 잘하면서 낫길 바랄 뿐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의사의 말은 수진에게 효과를 보였다. 물론 중간중간 짜증을 내긴 했지만 수진은 정구를 타박하지 않고 혼자서 육아와 가사 노동, 회사일을 다 해내었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제 그 고마움을 정구가 갚아야 할 차례였다. 스스로 ‘회피형'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정구는 가사 노동과 육아를 회피하지 않는 좋은 남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정구가 육아 및 가사노동에서 담당하는 비율은 예전의 30%를 회복했다.
5.
[한 과장님, 커피타임 가요]
[좋아요~ 나는 녹차라테 마셔야지]
2년이 지나 과장이 된 한선아와 대리 말년 차인 김미연은 여전히 친하게 지내면서 사내 메신저를 통해 커피 타임을 가지자고 한다. 김미연은 회사 사정 때문에 다른 사업부에 3년간 파견을 간지 3개월 째다.
“파견 생활은 어때? 할 만해?”
“뭐, 생각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아요. 저만 파견 온 게 아니라서, 파견자들끼리 같이 뭉치는 분위기도 있고 일도 많이 시키지는 않고요.”
“다행이네. 있잖아, 이 과장님- 아, 이제 이 차장님이구나. 차장님 요새 또 변화하시는 것 같아.”
“오… 새로운 인격의 출현인가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 멍과장 시기 지나고 나서부터 사람이 꽤 괜찮아졌잖아. 다른 사람 배려도 잘하고. 일도 곧잘 하고.”
“그랬죠. 명상이랑 요가가 좋다고 사람들한테 전파하기도 했잖아요.”
“그런데 요즘 파트 사람들이랑 1:1로 점심을 먹으면서 좀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하더라고. 아직 내 차례까지 안 와서 나도 듣기만 한 건데…”
“이상한 질문이요??? 어떤 건데요?”
“막, ‘자네는 두려운 게 뭔가?’, ‘요즘 행복한가?’ 이 두 개를 꼭 물어본대.”
“두려운 거랑… 행복한 거랑… 흠. 이런 걸 왜 물어보죠?”
“그걸 물어보면서 지난 3년 동안 자기한테 있었던 일을 사람들한테 이야기한대. 사과할 거는 사과하고.”
“이야… 나름 멋지네요.”
“그런 것 같아. 어떤 사람은 역으로 차장님한테 두려운 건 뭔지 물어봤대.”
“오, 뭐라 그러셨대요?”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그 상황을 현실로 만든다'라는 문장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는 두려운 게 없다고 했대. 그리고 두려움이 사라지니까 행복하다고 그랬대.”
“약간… 여전히 특이하시네요.”
“그렇지?”
“그래도… 모두까기 슈퍼맨이었을 때나, 멍과장일 때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응. 그건 나도 동감”
“앗 저 이제 일어나야겠어요. 과장님 이정구 차장님이랑 1:1 밥 먹고 나면 후기 들려주세요.”
“오케이~ 다음에 또 봐요.”
<끝>
- 인터뷰일 : 2019년 2월 1일
- 인터뷰이의 소설 만족도 : 4.6/5점
- 소설을 본 인터뷰이의 소감 :
1. 나의 스토리를 창작물에 담아 제3자의 시각에서 쓴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또 이를 통해 나의 스토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소개하려한 목적이 잘 충족된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꽤 긴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이를 5페이지라는 짧은 양에 빠지지 않고 적절히 담아낸 작가의 역량에 박수를 드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2. 인터뷰를 통해 전달한 많은 사건과 그에 대한 나의 감정들을 5페이지라는 공간의 크기안에 빠짐없이 담으면서도 빠르게,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작가가 고심한 흔적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능력을 배워서 나와 누군가의 이야기를 언제가 글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3. 이 소설에서는 직장내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인공의 후배동료들을 주요 관찰자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배>라는 장편소설처럼, 기회가 된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아내를 주요 관찰자로 그 시각에서 쓴 글도 볼 수 있었으면 흥미롭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4. 저와 비슷하게 자신의 복잡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쉬운 스토리로 만들어 공유하고 싶은 생각을 가진 다른분들이 있다면 리지블루스의 <3인공 주인공 시점> 을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글/김명선
- 수원에서 인터뷰서점 '리지블루스' 운영
- lizzyblues0330@gmail.com /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