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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Mar 07. 2019

#9. 멀티라이퍼

한나무 님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3인칭 주인공 시점>은 1시간의 1:1 인터뷰 진행 후 짧은 소설을 써드리는 프로그램입니다. 소설은 인터뷰이의 동의를 받아 익명화되어 배포합니다. 배포된 소설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멀티라이퍼






1.

이름 : 남영승

현재 직업 : A전자 개발자

나이 : 35세 

사는 곳 : 수원 영통구 한빛아파트 109동 207호 


  나무는 자신에게 전달된 프로필을 바라보았다. 2119년에 그가 살아야 할 이름과 사회적 지위가 적혀 있었다.

  ‘무난한 한 해가 되겠군' 

  나무는 3년 전 ‘멀티라이프 네트워크'에 가입했다. 이 네트워크에 가입된 사람들은 ‘멀티라이퍼'라고 불리며 1년에 한 번씩 무작위로 새로운 이름과 직업, 사는 곳을 배정받는다. 그 프로필은 네트워크 속 누군가가 작년에 살던 프로필이다. 나무 역시 내년에는 누군가에게 이 프로필을 넘겨줘야 할 것이다. 직업적 지식은 데이터를 뇌에 다운로드하면 끝난다. 

  나무가 이 네트워크에 가입한 이유는 빚 때문이다. 28살이 되던 해, 우연히 친구를 따라 들어갔던 카지노에서 나무는 전 재산을 탕진하고 빚을 지게 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빚을 갚는데 동원될 판이었다. 그때 카지노 측에서 이 네트워크를 소개해 주었다. 카지노가 속한 모기업의 회장이 실험으로 진행하고 있는 사업인데, 아직 테스트 중이어서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고 했다. 5년 동안 1년에 한 프로필씩 살아가는 게 조건이며, 5년 후에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한나무라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갈 것인지, 계속 이렇게 멀티라이퍼로 살아갈 것인지 말이다. 5년 동안 이 테스트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했다. 나무에게는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사실 나무는 이 네트워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유료로라도 가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꿔보던 나무였다. 5년 동안 5개의 삶을 살아본다니! 상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걱정되는 것은 나무의 삶 또한 하나의 프로필이 되어 다른 멀티 라이퍼에게 배정된다는 것이다. 5년 동안 5명의 사람이 나무의 삶을 대신 살아줄 것이다. 그들이 나무의 삶을 망쳐놓을 수도 있고, 현재의 나무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줄 수도 있었다. 도박 같은 선택이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겠습니다" 

  나무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2.

  하지만 멀티라이프 네트워크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첫 해에 나무에게 배정된 삶은 군인이었다. 그것도 갓 입대한 이등병 김주원의 삶이 주어졌다. 

  ‘원래 삶을 살 때 공익요원으로 근무했는데 남의 삶으로 군대를 겪게 되다니… 맙소사' 

  강원도 삼척에서 엄동설한 추위에 맞서 보초를 서면서 나무는 빨리 이 1년이 지나가길 바랐다. 탈영을 하거나 선참에게 하극상을 해보는 상상도 해봤다. 막살아도 죽지만 않는다면 1년 후에 다른 프로필을 살 것이기 때문에 김주원의 삶에 큰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나무는 그러지 않았다. 잠시겠지만 감옥에 갇히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내년에 이 프로필을 살아야 할 사람에게 너무 큰 짐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방일보 주최로 전우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우승 상금은 1등부터 3등까지 각 30만 원에서 10만 원까지 주었다. 나무는 어릴 때부터 빠르게 뛰지는 못했지만 오래 달리기는 잘했다. 이번에도 큰 준비 없이 나갔는데, 달리다 보니 어느새 자기 앞에 2명밖에 없었다.

  ‘이러다 3등 하는 거 아니야? 항상 돈이 부족해서 PX에서 냉동만두 한 번 못 사 먹었는데…’

  그때 나무의 바로 뒤에서 헐떡이며 달리는 후임이 보였다. 나무가 김주원으로 살 날이 열흘밖에 안남기도 했었다. 후임도 돈이 별로 없어 PX를 잘 못 다니는 사정을 알고 있었다. 주원은 후임에게 3등을 양보했고, 후임은 분대 사람들에게 냉동 만두를 돌렸다. 나무는 뿌듯해하며 김주원으로의 1년을 마쳤다. 


3.

  두 번째 해에 배정된 삶은 정상급 아이돌 예화몽의 막내 주몽으로서의 삶이었다. 주몽의 데이터를 다운로드하고 나자, 나무는 춤과 노래를 수준급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첫 한 달은 바쁘지만 행복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주몽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백만 명이 넘었고, 셀카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 수는 몇십만을 쉽게 받았다. 나무는 인스타그램에 중독되어 매일 사진을 올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악성 댓글이 지능적이고 조직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종종 ‘죽어라' ‘관심종자 새끼' 같은 댓글이 있긴 했지만 무시했는데, 한 댓글에서 주몽이 클럽에서 마약을 하고 있었다는 제보를 사진과 함께 올렸다. 사진은 희미했지만 주몽과 비슷했는데, 이는 곧 기사화되었고 악플 세례가 쏟아졌다. 소속사와 함께 그 사진 속 사람이 주몽이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내보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5명이 소속된 예화몽 그룹 멤버들은 주몽을 차갑게 응대하면서 알아서 탈퇴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주몽은 하루아침에 만인의 연인에서 마약쟁이로 전락하게 되었다. 나무는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 술을 마시며 한 해가 빨리 지나가 다음 프로필을 받을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4.

  세 번째 해에 배정된 삶은 A전자 개발자 남영승이었다. A전자는 중소기업으로, 대기업에 원자재를 납품하는 것으로 이윤을 창출했다. 35세의 남영승은 입사한 지 8년 차로 연봉은 4000만 원 정도였다. 연봉은 대한민국 평균 정도였지만 문제는 남영승이 이혼 후 재산분할 소송에서 패해 매월 30만 원을 제외하고는 전 부인에게 양육비와 위자료 명목으로 고스란히 보내줘야 하는 형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점심은 무료로 주고 저녁은 법인카드를 지급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교통비와 통신비,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나면 월말에는 항상 빠듯해졌다. 나무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전 부인에게 매달 빠져나가는 돈을 보며, 결혼이란 신중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나무는 혼자 야근해야 할 일이 있어 회사 근처 순댓국집에서 저녁을 먹고 법인카드로 계산하려 했다. 순댓국 값은 7000원이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카드 승인이 안 나네요. 다른 카드 있으세요?”

  나무는 회사 경리한테 최근 법인카드로 전산 비품을 크게 구매해 한도가 다 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생각났다. 남영승의 체크카드를 건네주었다. 

  “이 카드도 안된다고 나오는데요?”

  순댓국집 주인은 슬슬 짜증이 나는 것 같았다. 나무는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말일이었고, 카드에 잔액이 없을 것 같았다. 핸드폰으로 친구한테 연락을 하려고 보니 핸드폰도 꺼져 있었다. 

  그때 옆으로 한 군인이 다가왔다. 가슴팍에 새겨진 이름은 ‘김주원’이었고, 하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영승이 멀티라이프 첫 해에 살았던 김주원이 군대를 제대하고 아예 직업군인이 되어 하사가 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영승은 아는 척을 했다. 

  “어... 혹시 2년 전에 전우마라톤 대회 나가지 않았어요?”

  “네… 맞습니다만.”

  “제가 그때 2등 했던 사람이거든요.”

  나무는 재빨리 거짓말을 지어냈다. 

  “아, 네… 제가 그때 4등 했죠.”

  “이것도 인연이네요. 정말 죄송한데, 혹시 7000원만 빌릴 수 있을까요? 법인카드가 갑자기 막혔고, 제 카드에도 돈이 없어서요. 핸드폰까지 전원이 나갔습니다.”

  나무는 말하면서 스스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다. 

  “아… 어쩌죠? 저도 정말 빠듯하게 사는 형편이고 오늘 월말이라 지금 계좌에 만 원밖에 없어요. 죄송합니다.”  

  김주원은 공손하게 말하고 자기 밥값을 계산하고 순댓국집을 나갔다. 나무는 결국 가게의 전화를 빌려 영승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영승의 아버지는 ATM으로 영승의 계좌에 돈을 보내주었다. 이 과정에 소요된 시간은 약 20분이었고, 나무는 순댓국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한심한 눈총을 견뎌내면서 구석에 앉아있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순댓국 한 그릇 계산을 마치고 나오며 나무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돈, 그놈의 돈!!!’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면서도 돈 때문에 서러운 꼴을 겪게 되는 게 비참했다. 그리고 신기했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김주원을 마주친 것이 묘했다. 또한 김주원이 여전히 궁핍하게 살고 있는 것이 어찌 보면 자신이 김주원으로 살 때 마라톤 상금을 후임한테 양보했던 것과 연관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남영승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신기했다. 


5.

  네 번째 해에 나무에게 배정된 프로필은 18살의 가출 고등학생 신건주였다. 요리를 좋아해서 셰프를 꿈꾸면서 특성화고에서 요리를 배웠는데, 아버지의 계속되는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온 상황이었다. 나무가 삶을 건네받았을 때, 신건주는 순댓국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나무가 남영승으로 살았을 때 고역을 겪었던 그 순댓국집이었다. 이쯤 되니 나무는 자신이 살고 있는 5년의 삶에 어떤 의미나 운명 같은 게 있는 건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순댓국집에서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바빴고, 건주는 고등학교를 자퇴 후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배정받을 때마다 이전 삶에서의 능력은 포맷되기 때문에 나무가 건주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공부는 새로 해야 했다. 일을 마치고 식당에 붙은 쪽방에 들어오면 그냥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이나 하다가 자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다가 배정된 시한부 인생일 뿐이지만, 그래도 인연인데 이 사람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했다. 다행히 나무가 신건주의 삶을 사는 동안 검정고시를 패스했고, 순댓국집에서도 인정을 받아 새로운 직영점을 낼 때 건주를 주방장으로 고용해 주었다. 지금까지 나무가 살았던 삶 중에 가장 많은 성장을 이뤄낸 삶이라, 연말이 다가올수록 아쉬움이 컸다. 


6.

  다섯 번째로 나무에게 주어진 삶은 30대 초반의 교육용 보드게임 기획자 박운걸이었다. ‘배움은 언제나 즐거워야 한다'는 철학을 토대로 수학, 영어 등의 교과목부터 진로 교육까지 다양한 교육 보드게임을 제작했다. 박운걸은 지금까지 살아본 사람들과 비교해 탁월하게 공감력과 창의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길을 걷다가, 샤워를 하다가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마구 떠올라 메모를 해야 했다. 뉴스를 보다가 불행한 사건이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무가 박운걸의 삶을 살아내는 데 조심해야 할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알코올 분해 능력이 없어 술을 마시면 안 되었고, 공황 장애가 있어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걸 가능한 피해야 했다. 이 두 가지를 빼면 박운걸의 삶은 장애 요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는 박운걸로 살면서 남는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도와볼까 고민하다가 가출청소년의 쉼터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직전에 가출청소년 신건주의 삶을 살아보았기 때문에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는 쉽지 않았다. 가출 청소년 중 여자아이들은 대다수 원조교제나 성매매 쪽으로 빠지게 된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그들에게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자고 제안을 해봤다. 

  “하, 아저씨. 뭘 알고나 지껄이세요. 저도 마음은 합법적인 일 하고 싶죠. 그런데 청소년이라서 부모님 동의서를 가져오라고 하네요? 제가 그걸 받을 수 있으면 가출을 했겠어요? 그나마 그런 거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뭐 전단지 알바 같은 건데요. 그거 해서 언제 방값 내고 밥 먹어요? 이 일, 처음에는 어려운데 하다 보면 익숙해져요.”

  나무는 쉼터에서 봉사를 하는 동안 막막함을 느꼈다. 


7.

  어느덧 5년이 지났다. 고작 5년이었을 뿐이었지만, 5개의 삶이었다. 이등병 김주원, 아이돌 주몽, 개발자 남영승, 가출청소년 신건주 그리고 보드게임 기획자 박운걸로서 살았던 삶은 어차피 나무의 삶이 아니었지만 묘하게 뿌듯하기도 했고 후회가 남기도 했다. 삶끼리 서로 교차되기도 했고, 하나의 삶이 다른 삶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2112년 1월 1일. 한나무는 어떤 장소로 오라는 좌표를 수신하게 되었다. 

  “한나무 씨, 5년 동안 멀티라이퍼로 살아야 할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이제 선택하셔야 할 순간입니다. 다시 한나무로 계속 사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앞으로도 멀티라이퍼로 살아가겠습니까?”

  “현재의 한나무 인생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나요?”

  “당연히 안됩니다.”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하지만 나무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말했다. 후회할 수도 있는 선택이지만, 후회가 남지 않는다면 그걸 선택으로 부를 수 있을까. 


<끝> 




- 인터뷰일 : 2019년 1월 22일 

- 인터뷰이의 소설 만족도 : 4.5/5점

- 소설을 본 인터뷰이의 소감 :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은 욕구를 잘 표현해주셨고 그 안에서 제 삶을 잘 표현해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김명선

- 수원에서 인터뷰서점 '리지블루스' 운영

- lizzyblues0330@gmail.com / 인스타그램 @bookstore_lizzy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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