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님께 쓰는 편지
1.
J님 안녕하세요?
책방지기 김명선입니다.
사실 책 전달하면서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까 쓸 말이 없어져서(그런 적 있으시죠... 생각만 할 때는 막 잘 나가다가 막상 실행하려고 하면 막히는...) 안 썼는데요.
오늘 뵙고 나니까, 그리고 바쁘신 와중에도 저한테 장문의 카톡을 주신 걸 보고 나니까 편지가 쓰고 싶어 졌어요. 더 솔직히 말하면 어제오늘 생각했던 이런저런 잡념들을 정리해야지-생각하는데 J님께 편지 쓰는 형식으로 써보면 어떨까, 싶어서 써봐요.
저한테 구매하신 <태도의 말들>에서 "'편지 같은 글'을 생각해 본다"라는 문장이 있거든요. 이 문장이 의미하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쓰는 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한 문장"이지만, 저는 왠지 제가 하고 싶은 말만 쓸 것 같네요.
2.
제가 오늘 돈독 오른 모습을 보여드렸죠. 갑자기 개인연금은 드셨나, 노후는 어떻게 대비하고 있으시냐... 등의 질문을 해서 많이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게다가 저녁 먹고 카페로 가는 길에 '개인연금을 들고 싶어도 들 돈이 없다'는 둥 가난한 척을 실컷 해서 결국 J님이 밥을 사고 제가 커피를 사는 상황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저축하는 형편은 아니지만... 저는 J님을 오랫동안 편하게 보고 싶으니까 앞으로는 밥 안 사주셔도 되어요. 사실 책도 굳이 저희 서점에서 안 사주셔도 괜찮아요. 항상 고마운 마음이고, 서점 운영에 큰 힘이 되긴 하지만... 아휴 이런 말 할 시간에 제 서점에서 책을 샀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치를 향상하기 위한 고민을 더 해야겠네요.
3.
토요일에 서점에서 에세이 쓰기 모임을 하는데, 제가 준비한 글쓰기 소재 중 하나가 '행복의 조건'이었어요. 저는 행복의 조건으로 돈이 중요하다- 같은 얘기를 쓰면서, 현재의 나는 돈이 크게 없어도 괜찮지만 미래의 나를 위해서 돈 걱정을 해야 한다-라고 썼어요. 쓰고 보니 더 맞는 말 같았어요. 그 생각이 계속 맴돌다가 어젯밤에 남편이랑 얘기를 하는데, 남편이 미래가 걱정이 되면 연금을 들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연금을 들만큼 돈을 벌고 있지 않다-라고 했더니, 남편이 그럼 지금 쓰는 돈을 줄여서 아끼면 어떠냐-고 했고, 저는 이 말을 듣고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지금보다 더 줄여서 쓰면 너무 스트레스받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괜히 오늘 갑자기 페이스북에서 눈에 띈 채용 공고에 지원해봐야겠다- 같은 말씀을 드렸던 것 같아요. 어떤 조직에 들어가도 지금 서점 하는 것보다는 당장 많이 벌 수 있을 테니까요.
4.
J님이랑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옛 팀장님인 Y님이랑 통화를 했어요. Y님한테도 돈돈 거렸는데, Y님이 황당해하면서 제 사고의 오류를 잘 짚어주셨어요. 그래서 다행히 자기소개서는 안 쓰게 되었어요.
5.
아직 서른 살밖에 안 되었는데 노후 걱정을 하는 게 제가 생각해도 웃기고 이상해요. Y님은 다시 회사에 들어가서 십몇 년 더 일한다고 해도 노후가 보장되지는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과연 그럴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탄탄한 직장 중에 한 곳을 다니고 있는 제 남편을 보더라도, 가끔 불안해지긴 해요. 제 남편이 50살 이후에 뭘 하고 있을지 전 정말 모르겠거든요.
6.
서점은 나름 성장하고 있어요. 서점을 중심으로 해서 작가, 출판사, 편집자, 인터뷰어 등 다양한 일을 해보고 있고요. 재밌어요. 수익이 많이 나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봤는데 처음에는 싸게 팔아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가 기억이 안나는 게 문제지만... 저는 지금 저의 가치를 싼 가격에 팔면서 테스트 중이에요. 나중에는 비싸게 팔 수 있길 바라면서요.
7.
누가 저한테 '너 지금 불행하지? 잘 못 살고 있지?'라고 말하면 할 말은 많아요. 그런 사람한테는 잘 살고 있다고 떵떵거리며 말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 스스로 물어보는 질문에 무너지는 것 같아요. 가끔은 잘 모르겠거든요. 제가 잘 가고 있는지.
8.
사실 뭐 아시다시피, 전 우울증 때문에 옵션이 많지 않아요. 사실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가장 최선인 것 같은데... 자꾸 그 사실을 망각하는 것 같아요.
9.
오늘 저한테 가장 필요했던 건, 정말 진부하지만 '너 지금 잘하고 있어'라는 말이었나 봐요. 서점을 혼자 해서 편한 점도 있지만, 격려도 위안도 결국 혼자 해야 해서...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 확인받고 싶을 때가 있나 봐요. 이런 것 보면 저는 아직 팀장님이 필요한 주니어인가 봐요.
10.
집에 돌아와서 남편이랑 얘기를 마치고, '어차피 단순히 끝낼 고민은 아니야'라고 했더니 남편이 '나는 지금 하는 고민이 쓸데없다고 생각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너는 어차피 그때 가서 끌리는 대로 결정할 거니까'라고 덧붙이더군요. 엄청 웃었어요. 반박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런 인간이니까요! A B C D... 열심히 검토하고, 고민하다가 다 버리고 결국 Z를 선택하는 인간이니까요.
11.
그렇지만 동시에, 제가 20대에 1년 넘게 한 일이 딱 두 개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봤어요. 한 가지는 pxd에 들어가서 2년 일했던 거고, 나머지 한 가지는 1년 4개월째 서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두 가지의 공통점은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오랜 시간 테스트를 해봤다는 거였어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갑자기 빛나는 기회에 현혹되지 말자-는 생각을 해봅니다.
12.
다시 한번 <태도의 말들>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주체적인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 관심사를 끊임없이 공부하는 일이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끊임없이 좋아하는 걸 공부하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아요. 내 실력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 43페이지
이런 문장을 읽는다고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잠시 접어둘 수는 있는 것 같아요.
J님, 비록 제가 하고 싶은 말만 주절거렸지만 이 글의 독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셔요.
- 김명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