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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Mar 30. 2019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1.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아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 본다. 돌이켜보면 나의 어린 시절 중에 ‘자아 찾기'에 집착하던 기억이 있다. 중학생 때 아주 짧은 소설을 하나 썼는데, 대강의 줄거리는 주인공이 험난한 여정을 거쳐 뭔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고, 결국 그것은 자아 또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 영상학과에 재학 중이던 친구가 나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해서 협조를 했었는데, 결국 그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나찾기 놀이'가 되었다. 내가 인터뷰 중 20대는 나를 찾아가는 놀이 같은 과정이다- 비슷한 말을 해서 친구가 그렇게 제목을 붙였던 것 같다. 그 영상을 찍은 게 벌써 5년 전이다. 앞자리가 3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어느 책에선가 평생을 걸려도, 죽기 직전까지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보았으니, 고작 서른의 나이에 나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 

내가 나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우울증을 여전히 앓고 있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우울증은 병이며, 병이기 때문에 왜 생기며 왜 쉽사리 낫지 않는지 인지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우울증은 다른 병과는 다르게 마음의 병이며, 어떻게 마음을 이해하느냐에 따라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면이 여전히 있다. 요즘도 종종 누군가와 내 우울증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내 우울증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대답할 때마다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 그나마 짚고 있는 원인은 내가 스스로의 한계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나의 한계가 100이라면 내 실제 한계는 50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니 50을 초과해서 100을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내 몸과 마음이 제동을 걸어서 생기는 게 우울증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한낱 우울증 환자의 개똥 가설일 뿐이다. 


3.

또한 내 욕망에 대해서 무지할 때가 있다. 나의 일부는 분명하게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 욕망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사람인데, 또 다른 일부는 의미, 재미, 가치 역시 강하게 추구한다. 대부분의 결정은 의미, 재미, 가치 3형제를 중심으로 내리는데, 그 후에 돈, 명예, 권력 3형제를 그리워하면서 결정을 후회한다. 흠, 쓰다 보니 이것은 욕망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라 선택과 포기할 줄 모르는 미숙함에 가까운 것 같다. 


4.

다시 원래의 질문인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로 돌아갔을 때, 앞에서 우울증과 욕망을 언급했던 것은 나는 사랑의 전제가 관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더 알고 싶어 지기 마련이니까. 나는 나를 더 알고 싶은가? 생각해보니 나를 더 알기 위해 했던 행동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마인드 프리즘이라는 곳에서 8만 원을 주고 심리검사를 받은 뒤 <내 마음 보고서>라는 책자를 받아본 것이다. 모든 말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이 검사를 통해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보는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어떤 면모를 알게 되었다. 또 하나는 다이어트의 목적이긴 하지만 나의 외모 사진을 지속적으로 찍는 것이다. 처음에는 몸무게라는 숫자에만 집착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원하는 것은 낮은 숫자보다도 조금이라도 덜 후덕해 보이는 외모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보고 있다. 지속적인 사진 찍기를 통해 나의 외모에 조금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살을 빼기 위해서는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5.

또한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인자한 관점을 가지고 관심 대상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방금 12시가 되어 남편이 나에게 꽃다발을 주는데, 포장이 아주 촌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촌스럽다고 생각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가 나를 위해 꽃을 사고, 이를 어딘가에 숨겨뒀다가 12시에 맞춰 나에게 주었다는 것이 더 우선적인 정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인자한 관점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를 인자한 관점으로 바라보는가? 우울증을 앓으면서 내가 수행하지 못했던 많은 일에 대해 나는 스스로를 용서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내가 폐를 끼친 사람들이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나를 용서해도 되는 걸까. 그럼에도 나는 나를 용서한다. 아주 인자한 관점을 통해, 내가 해내지 못한 일 자체보다 어떻게든 해내려고 했던 나의 노력을 보려고 한다.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려 한다. 으… 오글거리는 것 역시 나의 몫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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