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시작을 거부한다
1.
익숙하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들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계절이 바뀌면서 온도와 습도가 낮아지고, 햇빛 보기가 귀해지는 시기에는 으레 이런 시기를 보내기도 하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몸 상태가 더해져 더욱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울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감각적인 부분이기도 해서,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그때 왜 그렇게 힘들었지?'싶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진행형으로 통과하고 있을 때는, 여러 번 느끼더라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아, 이런 거였지. 진짜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
2.
하지만 나는 돌봐야 할 아이가 있으므로 마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돌고 돌아 내 멘탈은 결국 내 몫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나면, 주섬주섬 뭐라도 나를 끌어올려줄 방법을 찾아 시도하고,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스스로에게 제시한다.
내가 요즘 노력하는 일상 속 최소 가이드라인은 딱 두 가지다.
- 하루 두 끼의 밥을 챙겨 먹기
- 하루 한 번 샤워하기
우울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으잉? 이런 기본적인 걸 하는데 노력이 필요하다고?'싶을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지만, 우울과 무기력이 덮쳐올 때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같기도 하다. 입맛이 없는데도 뭔가를 먹어야 하고, 샤워를 시작하는데 정말 큰 마음이 필요하다.
3.
씻는다는 행위가 왜 그렇게 힘들까?
이건 정말 예전부터 우울할 때면 나한테 나타나는 행동 증상이었다.
씻지 못하겠어서 출근하지 못하거나 밖에 나가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씻다가 중간에 뛰쳐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씻어야지- 마음을 먹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까지 30분~1시간 이상 걸리기도 하고, 막상 씻으러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 물을 맞으며 샤워라는 행동을 끝마치기가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내가 짐작해 보는, 우울할 때 씻기 어려운 이유는, 씻는다는 게 일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집밖으로 나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들과 부딪히는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의 시작이 씻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집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씻는다는 건 일종의 정화 의식이고, 정화한다는 건 결국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우울할 때의 나는 시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원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그러니 아무런 실패도 상처도 없는 상태에 그저 머무르길 바라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4.
우울은 괴롭지만 동시에 굉장히 안정적이기도 하다.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 별다른 자극이 없으면, 그냥 거기에 있는 게 가끔은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하지만 그냥 그대로 거기에 꼼짝없이 있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우울 자체가 삶보다는 죽음을 원하는 상태에 가깝긴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존재가 죽은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울하지 않을 때 일상 속에서 매일 하는 행동들 - 먹고, 씻고, 만나고, 일하고, 잠자고, 놀고 등등 -이 하찮고 반복적인 것처럼 보여도 얼마나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는 활동인지, 우울한 시기를 지나지 않을때는 자꾸 까먹는다. 그래서 자꾸 욕심을 내게 되는 것 같다. 지금 이대로는 부족해-하는 마음으로.
5.
우울이 삶을 작아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작아진 삶에도 감사하게 만드는 겸손을 가르치기도 한다.
오늘 하루 두 끼의 밥을 먹고, 한 번 씻은 자신을 칭찬하고,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위로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