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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Jul 23. 2017

D-98. 백지의 하루하루

아득히 많은 시간에 대한 결투 신청

1.

난 전 직장에서 지난 5개월간 사내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5개월 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모여서 만남을 지속하다보니,

분명 회사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동시에 회사 사람이 아닌 특이한 관계가 되어

프로그램이 다 종료된 후에도 한 명의 용감하고 헌신적인 실행자에 의해 엠티가 추진되어

가평으로 엠티를 다녀왔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깜짝 롤링페이퍼와 선물도 받고,

오랜만에 대학생이 된 느낌으로 숯처럼 까만 엠티고기도 먹고

몸을 쓰는 퀴즈 게임 등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왔다.


2.

헤어질 때 사람들은 나를 참 부러워했다.  

내일 출근 안해도 되니까.


어제 올렸던 글을 페이스북에 공유했는데 축하한다는 반응도 있었다.


브런치에서 가장 인기 많은 글의 분류가 퇴사와 관련된 것이고,

퇴사를 제대로 준비하자는 취지의 "퇴사학교"도 생긴 걸 보면

퇴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긴 한가보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일의 출퇴근과 반복되는 업무를 해야 하는 생활 자체가 지겨울 수도 있고,

지금의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을 수도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안하는

여러 이유 역시 있을 것이다.


일단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은 소중한 것이며,

경력 단절은 두려운 일이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남들에게 요새 뭐하냐는 질문을 받는 게 불편해진다.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많아지는 것 자체도 좀 아득한 일이다.


매일 출퇴근과 기본 업무시간을 합하면 하루에 최소 10시간은 자동으로 채워지는 평일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매일이 약속 없는 주말과 같아진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이라면 충만하게 시간을 잘 보낼 수도 있겠지만,

돌아봤을 때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날이 꽤 많을 것이다.


회사 일 역시 돌아보면 아무것도 안한 것 같지만, 이 시간은 매달 월급으로 그 가치가 분명하게 매겨진다.

돈을 받지 않는 일에 대해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4.

결국 사람마다 퇴사 후 백수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람마다 정말 다르겠지만,

나는 일단은 좀 두렵다.


난 퇴사 후 백수 생활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에도 두 번째 회사를 우울증으로 도망치듯 그만두었다.


근 한달간은 자책을 하며 시간을 흘리고,

근 한달간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무엇들로 일상을 채우며 시간을 보냈고,

근 한달간은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육체 노동자로 살았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건 조금이라도 내 시간을 규칙적인 일에 할애하기 위함이었다.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낮잠도 잤다.

하루의 절반이 자거나 누워 있는 상태로 지나갔던 것 같다.


그때 알았다.

시간이 너무 많아도 불행하구나.


사실 이건 같이 사는 우리 할머니를 보면서도 느낀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기도를 하시고, 경로당 회장을 하시며 각종 여행이나 행사 등에 참여하시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할머니의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는 대상은 텔레비전이다.


순전히 관찰자적 시점에서 할머니의 행불행을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팔팔한 20대의 관점에서는 분명 너무 슬픈 일로 보인다.


5.

내일 출근을 안해도 되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아빠는 노는 것은 좋은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하신다.

엄마는 아침은 꼭 먹으라고 하신다. 다시 자는 건 상관없다며.


나는 이 글을 쓰고 내일 할 일들에 대한 할 일 목록을 작성할 것이다.

난 범생이 기질이 있으니까 하나하나 체크하며 시간을 보내겠지.


그러다 문득 문득, '지금부터는 뭘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거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다.

모든 시간을 의미있는 할 일들로 채우지 않으면 슬픈 사람.


여기까지 적고 나니, 좀 웃기다.

나는 회사생활하고 좀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


6.

분명 배부른 소리이지만,

난 앞으로 매일 매일 만날 백지같은 하루가 좀 무섭다.


누가 보면, 아 그냥 좀 아무것도 안하면 뭐 어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놀더라도 좀 재밌게 잘 놀고 싶단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프로 잉여가 될 그릇은 아닌 것 같다.

할 일 목록에 스스로를 속박하며 살긴 하겠지만,

재밌게 즐겁게 지내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한 나이지만,


그런 나를 데리고 한 번 잘 놀아보아야겠다.

덤벼라, 백지의 하루하루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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