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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Jul 24. 2017

D-97. 두 사람

서로의 섬에 대한 존중

1.

남자 친구가 아파서 연차를 냈다.

다행히 나는 백수라 그에게 약과 죽을 사다 줄 수 있었다.

같이 옛날 영화를 한 편 보고,

저녁으로 순댓국을 먹고,

카페에서 같이 책을 읽다가 집에 돌아왔다.


2.

남자 친구와 나는 둘 다 수원에 살지만

남자 친구가 사는 곳까지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거의 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 남자 친구가 착해서 항상 차로 나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공주 대접을 3년간 받았다.

정말 일이 있을 때만 내가 택시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그의 집에 갔었는데

그럴 때마다 일상화된 남자 친구의 배려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3.

요즘 결혼 준비에서 할 일은 청첩장 만들기이다.

업체 세 곳에서 샘플 신청을 받아서 디자인은 골라놨다.

원래는 디자이너 친구한테 부탁해서 디자인을 해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럴 만큼 의욕이 있지는 않았다.

대신 청첩장 안에 들어가는 문구만은 내가 써보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아침에 문구 3개 정도를 적어보았다.


4.

최종 선택을 받지 않은 두 가지 안 중 하나는

주례를 서주시기로 약속한 초등학교 은사님께 선물 받은 동화책을 참고로 만들었다.


두 사람이 만나
드넓은 바다 위의 두 섬처럼 함께 하려 합니다.
태풍이 불면 함께 바람에 휩쓸리고
해질녘 노을에 같이 물들 것입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앞날을 시작하는데
부디 함께 하시어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5.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동화 <두 사람>은 정말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다.


연인일 수도,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열쇠와 자물쇠, 두 창문, 두 개의 시계, 모래시계의 두 그릇 등에 비유해서 이야기한다.


그중 결혼을 앞둔 나에게 가장 와 닿았던 비유는 두 섬에 대한 비유다.


두 사람은 드넓은 바다 위 두 섬처럼 함께 살아요.
태풍이 불면 함께 바람에 휩쓸리고
해질녘 노을에도 같이 물들지요.
하지만 두 섬의 모양은 서로 달라서
자기만의 화산, 자기만의 폭포,
자기만의 계곡을 가지고 있답니다.

- <두 사람>


태풍이 불면 함께 휩쓸리고, 노을에 같이 물들 정도로

같은 곳에 붙어있지만 두 사람은 분명 각각의 섬이다.

모양도 서로 다르고, 자기만의 화산, 폭포, 계곡을 가지고 있다.


6.

같이 살게 되면 분명 많은 일을 함께 겪을 것이다.

집에 갑자기 물이 안 나오거나 정전이 되는 일도 함께 겪을 것이고,

각자의 가족들과 관련한 행사들도 같이 보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글을 쓰고, 그는 게임을 할 것이다.

나는 긴 세계여행을 꿈꿀 수도 있고,

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잘 다니며 휴식을 위한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다.


놀랄 정도로 멋지면서도

황당할 만큼 이상한 특성을 각자 유지할 것이다.


7.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함께여서 더 어렵고
함께여서 더 쉽습니다.

- <두 사람>


결혼 준비를 하면서,

어떨 때는 함께 살아서 어려울 점이,

어떨 때는 함께 살아서 쉬울 점이

더 크게 느껴진다.


더 어려운 점이 크게 느껴질 때는 결혼을 후회하기도 한다.

항상 가족의 구성원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내 선택이 온전히 내 선택이었던 적이 많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큰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더 많은 사람에게 내 선택에 대한 이해를 구해야 한다.


결혼이 어려운 점은 이게 두 사람이 같이 사는 문제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동거가 쉽지 않은 한국에서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에는 줄줄이 딸려오는 사은품이 참 많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본질은 두 사람에 있다.

우리는 서로의 섬을 존중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살아봐야 알 것 같다.



*이 글의 인용구는 <두 사람>(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사계절)에서 인용되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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