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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02. 2017

D-88. 작은 티라노

14개월 된 머리 큰 생명체

1.

작은 티라노가 우리 집에 왔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우리 집에 있을 예정이다.

티라노의 부모가 잠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착한 티라노는 울지도 않고 할머니와 잘 논다.


2.

티라노는 최근 걸음마를 시작했다.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귀여운데 뭔가 자꾸 생각났다.

그것은 티라노사우르스였다.

걸을 때는 꼭 팔을 얼굴 쪽에 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엉덩방아를 많이 찧기도 했지만 그건 티라노에게 일상과도 같은 실패였다.


3.

티라노는 나를 별로 안 좋아했다.

내가 안아주어도 버둥거리면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백수가 된 이후로 점점 익숙해져서인지 자신의 필살기를 많이 보여준다.

티라노는 아직 말은 제대로 못하지만 몇 가지 필살기를 가지고 있다.

고사리같이 조그만 손을 맞대는 하이파이브,

두 팔을 들어올려 머리 위에 올리는 사랑해요,

앉은 자세에서 엉덩이를 쑥 내밀면서 고개를 내리는 안녕하세요 등등


오늘은 나에게 여러번 사랑해요를 해주었다.


4.

난 오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평소와 달리 몸이 좀 무거웠고 운동을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갔다.

졸려서 잠을 계속 잤다.

평소보다 3시간이나 더 많이 잤다.

난 너무 많이 자면 악몽을 꾼다.

오늘의 악몽은 내 대학 졸업이 취소되어서 이 나이에 중학생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내 문제집들을 다 훔쳐갔다.

그리고는 또 낯선 학생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과외를 할 것처럼 나를 시험해보고 갔다.


꿈은 거기서 끝났다.

머리가 찡하게 아팠고, 몸은 더 무거워졌다.


잠을 많이 자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생활규칙은 지키는 게 몸에나 마음에나 좋은 것 같다.


5.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파업을 선언한다.

조깅도, 책읽기도, 심리학강의 듣기도 하지 않을 예정이다.


미루고 미뤘던 비밀의 숲이나 좀 봐야겠다.

그리고는 엄마를 도와 티라노를 좀 봐야지.

귀찮긴 하지만, 티라노는 정말 귀여운 생명체니까.


가끔 집에 굴러다니는 조그만 장난감 전화기나,

티라노가 좋아하는 개구리 인형 등을 볼 때면

무섭고 슬픈 생각이 언뜻 스쳐간다.

티라노가 어느 날 사라지는 아주아주 무서운 생각.

그것은 분명 우리집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재앙 중에 하나일 것이다.


티라노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나야 한다.

모두를 위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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