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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10. 2017

D-81. 전환

김희경, <내 인생이다>

1.

작년에 롤링다이스에서 기획한 <여성의 일, 새로고침>이라는 강연을 들었다.

일하는 여성 5명이 각자의 주제를 가지고 강연 및 대담을 하는 자리였는데, 그 중 김희경이라는 분이 '전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다.

지금은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하고 있고, 그 전에는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17년을 근무하신 분이다.

오늘 글의 소재인 책 <내 인생이다>는 2010년에 출판된 책으로, 김희경 씨가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스스로도 인생의 전환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합정역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샀는데, 분류가 자기계발/성공학으로 되어 있어서 약간 멈칫했다.

김희경 씨를 강연에서 알게 된 후 오랫동안 위시 리스트에 있던 책인데, 자기계발서라면 일단 거르고 보는 심보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전환 전의 삶에서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분들이 많아서 경계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이 책에는 10개의 플래그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나의 독서습관인데,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치지 않고 플래그 포스트잇을 붙여둔다.)

그만큼 와닿은 문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역시 진솔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의 이야기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2.

하프타임은 삶의 방향 전환을 앞둔 성인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기 이전에 자신을 가다듬는 통과의례로 활용할 수 있는 기간이다. 어떤 '상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와 '상태' 사이의 중간 지대, 그 사이의 '과정'을 살아보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둘 다이기도 한 풍성한 상태, 사회적 관계를 일시 정지시키는 경계 지대에 자발적으로 머물면서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스스로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얻을 수 있는 기간이다.
- 21페이지(PR컨설팅 회사 사장 -> 1인 기업가로 전환한 김호 님 이야기 중)


하프타임이라고 이름 붙이니 꼭 인생에서 반쯤 온 시기에 가지는 시간만을 지칭하는 것 같아 아쉬운 것 빼고는, 자발적 백수 생활에 대한 더할나위 없는 표현이다. 앞날에 대한 불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어 신나기도 한 나의 중간 지대.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통과의례를 앞두고 있기도 하지만, 이미 내 통과의례는 회사를 그만둘 때 시작되었다.


반면 아직 때가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무리하지 말고 대신 준비를 하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장단점을 따지는 등 계획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말고, 무보수로 하든 주경야독을 하든 원하는 일에 발을 슬쩍 담가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는 거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고, 무엇에 관심이 있다는 생각을 주변에 이야기해 소문을 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 54페이지
피터 드러커는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스스로 거듭나기를 계속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강력한 방법 세 가지를 권했다. 가르치는 것, 조직 밖으로 나가보는 것, 낮은 직급에서 봉사해보는 것이 그것이다.
- 61페이지 (광고인 -> NGO활동가로 전환한 최혜정 님 이야기 중)

 이 분만이 아니라 다른 분의 이야기에서도 전환 후의 삶에 대한 '준비'에 대한 당부가 무지 많이 나왔다. 그렇지만 여기서의 준비는 대체로 계획이나 전략이 아닌, 직접 부딪혀서 조금이라도 직접 경험해보라는 이야기였다. 이미 일을 그만둔 나는 '윽, 내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지만(알면서도 그만둔 것도 있다) 지금에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덥석 결정하기 보다는, 여기저기 슬쩍 담가보면서 맛보고 계속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UX분야로 처음 걸어들어갈 때 이 방법을 썼었는데 괜찮았던 것 같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보고, 공공기관에서 주도하는 프로젝트도 해보고, 가고 싶은 회사에서 인턴도 해보고. 지금은 인턴이나 수습 기간이 변질되어서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형국이 되었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노동자에게도 인턴/수습 제도는 큰 장점이 있다고 본다.


반면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른다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순환되고, 빠름과 느림처럼 서로 다른 형태의 시간이 하나의 삶 속에 공존할 수 있다고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의 선택을 격려했다.
- 76페이지(신문기자 -> 의사로 전환한 이영이 님 이야기 중)


마흔셋에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의사가 되기로 전환한 이영이님의 선택은 15인의 선택 중 가장 인상깊은 선택이었다. 스물여덟살인 나도, 아주 가끔 의대 생각이 날 때마다 '에이 너무 늦었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분은 마흔셋에 의사가 되길 선택하다니! 이 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결연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는 정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다'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른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접하는 시간은 숫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계도 숫자, 달력도 숫자, 나이도 숫자...

그렇지만 동시에 시간 자체에 순환의 속성이 있기도 하다. 12시가 지나면 다시 1시가 되고, 12월이 가면 1월이 온다.

안타까운 건 나이는 순환이 안된다는 거다. 만약 인간이 진짜로 순환하는 삶을 산다면 - 예를 들어 마흔살 정도까지 살고 나면 다시 한살이 된다든가... - 어떨까? '리셋'에 대한 생각은 중고딩들도 많이 하는데, 리셋은 정말 불가능할까?

분명 삶의 어떤 부분은 축적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지만, 또 어떤 부분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도 같다.


무계획을 상쇄해주는 것은 이걸 해서 그다음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걱정하는 대신 지금 이 자리에 충실한 것뿐입니다. 제 철칙은 '오늘 하루를 집중적으로 잘 살자'입니다.
- 88페이지(광고인-> 요리사로 전환한 오시환 님 이야기 중)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루하루는 부지런히,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연결되는 말로 공지영 씨가 어느 책에서 한 말도 기억한다.

선택이 최선이 되게 한다.


정글짐같이 촘촘한 전략을 짜서 목표에 접근한다는 선배를 안다. 훌륭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치만 난 당최 내 인생의 빅픽쳐를 못 그리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뿐이다.


왜 번번이 '튀는 것'으로 자신의 상황을 해결해왔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선명한 진실은 '나는 무능하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일과 사람들을 버리며 도망쳐 다녔다는 것이다.
- 171페이지(미국 공인회계사-> 요가 지도자로 전환한 민진희 님 이야기 중)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3년 반 동안 3개의 직장을 다녔다. 첫 번째를 제외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모두 일종의 '튐'이었다고 본다.

내가 인정하기 싫은 진실도 '나는 무능하다'였을까?

어느 정도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판타지를 갖는 건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하고 생각하는 '소망사고'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멋진 일이 일어나 마법과도 같이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하는 전환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과학적으로도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두뇌는 수억 개로 연결된 뉴런의 활동으로 이뤄지는데 생각과 느낌, 행동의 기본 패턴을 바꾸려면 수억 개의 새로운 뉴런의 연결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한다. (...) 그러므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능력과 열망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 214페이지(디자이너-> 소믈리에로 전환한 최해숙 님의 이야기 중)


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나보다. 수억 개의 새로운 뉴런이 연결되어야 하다니, 후덜덜하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꿈꾸기엔 그렇게까지 꿈이 많지도 않고, 그렇게까지 낙관적이지도 않다.

다만 우울증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감이 하락하는 건 막고 싶다.

내 능력과 열망, 그리고 우울증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


(...) 희귀병이라는 호산구성 농포성 모낭염 진단을 받았다. 심한 스트레스로 면역 체계가 무너져 생긴 질환이라고 했다. 의사가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다면서 소설이고 뭐고 그만두라고 강권했지만, 그는 이 병으로 내리 4년을 고생하면서도 그저 얼굴 때문에 글쓰기를 그만둘 수는 없지 않나 생각했을 뿐이다.
- 229페이지(간호사-> 소설가 정유정 님의 이야기 중)


정유정 작가는 2011년에 낸 '7년의 밤'으로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우뚝 섰다. 하지만 이때 인터뷰할 때만 해도 세계문학상을 받은 '내 심장을 쏴라'만 유명한 정도였다.(물론 이것도 엄청난 성공이긴 하다)

글쓰는 사람의 이야기이다보니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나도 글쓰는 게 좋고, 어제 친한 후배랑 얘기하면서 '소설에도 도전해봐?'라는 생각도 해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히려 약간 좌절감을 느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소설가가 되었고, 번번이 계속되는 공모전 실패에도, 스트레스로 희귀병에 걸려도 '그저 얼굴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집념이라니.

그저 대단하고, 또 대단하다.

이 정도의 열정 앞에서는 그저 경외감이 들 뿐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마주 봐야 해요. 이 일이 정말 하고 싶은가 아니면 그것이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나 외양에 시선이 꽂혀서 하고 싶어 하는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거죠. 글을 쓰고 싶다면 '대체 글을 써서 뭐할 건데?'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해요. (...) 전부 죽자 사자 하는 건데,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은 결국 '동기'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싶어하나'가 분명해야 해요.
- 236페이지(정유정 님의 이야기 중)


15인의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패턴 중 하나가 '겁나 고생하고 좌절했지만, 열심히 두드리니 그때는 온 우주가 도와주더라'였다.

흔한 성공담의 패턴이긴 하지만, 그 '겁나 고생하고 좌절한' 이야기가 너무 디테일해서 '어떻게 버텼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동기.

내게도 그런 게 생길까.

생겼으면 좋겠다.


(...) 나는 우리가 흔히들 떠올리는 '대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만큼 했으니 좋은 일이 와주겠지' 하고 기대하는 노력의 대가뿐 아니라 우리는 종종 실패나 불운의 대가도 기대한다. '이만큼 겪었는데 나쁜 일이 또 생기진 않겠지' 하고 다음번엔 액운이 피해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 엄홍길 씨가 남달랐던 것은 성공의 수보다 많은 실패를 겪으면서도 실패의 대가를 바라다 좌절하지도 않았고, 노력의 대가를 바라는 마음에 스스로 짓눌리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 249페이지(전문 산악인-> 사회사업가로 전환한 엄홍길 님의 이야기 중)


실패의 대가에 대해 생각한다는 개념이 재밌었다.

내 우울증의 증상은 출근을 못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실패의 대가 마인드가 있었다.

오늘은 우울했으니 내일은 괜찮겠지, 오늘은 출근 못했으니 내일은 하겠지... 같은.


주사위는 1/6의 확률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번 내내 1만 나올 수도 있다.

랜덤이니까.

불행이나 실패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대가를 기대하는 건, 그냥 인간의 마음일 뿐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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