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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19. 2017

D-72. 팬이야

자우림 20주년 콘서트를 다녀와서

1.

초등학교 때부터 용돈을 모아 테이프나 CD 사는 걸 좋아했다.

아빠는 인터넷으로 다 공짜로 받을 수 있는 건데(소리바다가 한창 성행했었다) 왜 사냐고 타박을 하곤 했지만, 지금도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은 곧잘 CD로 산다.

한 때 정리를 하면서 꽤 버리기도 했지만, 고이 놔둔 CD의 대부분은 자우림의 음반들이다.

'팬이야'가 타이틀곡이던 4집 앨범 테이프를 산게 시작이었으니, 나의 팬질은 2002년부터 시작했나보다.


2.

자우림의 팬이 된 계기는 잘 기억이 안난다.

고작 초딩이 명암이 분명한 가수의 음악세계를 이해했을 가능성은 낮아보이고.

아마도 보컬 김윤아의 카리스마에 빠진 게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난 자우림의 팬이라기보다는 김윤아의 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김윤아의 솔로앨범을 다 구매하고, 콘서트도 갔다올만큼 좋아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유닛활동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3.

중학생 때는 자우림 다음 카페에 가입해서 활발한 활동도 했었다.

공개 방송 같은데를 쫓아다니기도 했고.

그런 자우림이 벌써 데뷔 20주년이 되어 콘서트를 한다니.

예매 시간을 까먹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지만, 열심히 표줍기를 한덕에 겨우 한 자리 구해서 혼자 다녀왔다.

막상 가보니 내 옆사람도, 옆옆사람도 혼자 온 걸 보니 전혀 외롭지 않았다.


4.

자우림은 음악 저변이 넓은 밴드다.

하하하쏭', '매직 카펫 라이드'과 같은 밝은 곡도 많지만 '미안해 널 미워해', '파애' 등 어두운 곡도 많다.

오늘 공연은 '마왕'으로 시작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김윤아는 "앞으로 무서운 곡들을 앉아서 듣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고, 실제로 '파애', '미안해 널 미워해', '욕', '낙화' 등 어두운 곡이 계속 이어졌다.

중간에 이선규와 김진만도 한 곡씩 부르고 나서, 하얀 드레스로 바꿔 입은 김윤아가 등장했고, 그때부터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17171771'을 시작으로, '헤이헤이헤이', '매직 카펫 라이드', '하하하쏭' 그리고 '일탈'까지. 자우림의 대표 신남쏭들로 앉아있던 관객들을 일으켜 세웠다.

앵콜 송으로는 아껴두었던 '스물 다섯 스물 하나'와 '샤이닝'을 내놓았다.

김윤아 스스로도 "자우림의 대표곡만 아는 분이라면 딥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공연"이라고 말할 정도로, 초반의 곡 선정은 어두운 곡일뿐 아니라, 그리 유명하지 않은 노래들도 꽤 있었다.

심지어 내가 모르는 노래도 한 곡 있었는데(내가 엄청난 팬은 아니지만, CD를 꽤 돌려듣기 때문에 제목까지는 몰라도 낯선 곡은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나중에 폭풍 검색해보니 정규앨범 사이에 내놓은 제목 없는 EP앨범 수록곡이었다.

다 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순간 팬으로서의 자격 상실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5.

아무것도 모르고 유치한 감상에
빠지는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이라는 것 쯤
누구보다 잘 알아
(...)
달콤한 데 빠지는 게
뭐가 나쁘단 건지
헛된 망상에 빠지는 게 뭐가 나쁜지
나는 사랑을 할 뿐이야
쇼가 계속되는 동안

- 자우림 8집 <음모론> 중 'IDOL'


워낙 대단하게 팬질 또는 덕질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지라, 나의 자우림에 대한 팬심을 자랑하기 좀 민망하다.

김윤아의 사진을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해놨던 적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의 자우림에 대한 애정은 음악적인 면에 국한된다.

진짜 아이돌을 좋아하는 분들처럼 그 사람의 사소한 것까지 다 좋아하고 챙기는 팬질을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위의 'IDOL'가사처럼 팬질은 나쁜 게 아니다.

그 사람은 나의 존재조차 모르지만, 그 역시 내 선택이다.


6.

쓰다 보니 너무 당연한 소리를 적은 것도 같다.

요즘처럼 덕후를 예찬하고, 팬클럽 경력도 스펙으로 인정받는 시대에.


7.

뭔가를 열심히 싫어하고, 반대하는 것이 사회 변화에 꼭 필요할 때도 있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열심히 좋아하고,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팬이 되고, 자신의 팬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팬질도 꼭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나의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해
지지않고 매일 살아남아 내일 다시 걷기 위해서
나는 알고 있어 너도 나와 똑같다는 것을
주저앉지 않기 위해 너도 하늘을 보잖아
언젠가의 그 날을 향해
(...)
I'm my fan
I'm mad about me
I love myself
Day after day I'm saying same prayer for me
I see the light shining in my eyes
- 자우림 4집 <04> 중 '팬이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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