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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Aug 30. 2017

D-61. 천천히 걷기

1.

서울에 가는 날이었다.

점심 약속이 있었고 운동을 했다.

2월 6일에 시작한 26회의 PT(Personal Training)가 드디어 끝났다.

잠시 짬난 시간에 잃어버린 이어폰을 사고, 서점에서 책을 읽다가 저녁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부지런히 역으로 걸어갔다.


평소처럼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데,

문득 '좀 천천히 걷자'던 팀장님이 생각났다.

생각해봤다.

- 내가 약속에 늦었나?

아니었다.

-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걷고 있지?


2.

난 원래 빨리 걷는 편이다.

밥도 빨리 먹고, 말도 빨리 한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이유를 생각해보려 하지만

너무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서 잘 생각이 안난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뭔가를 빨리한다는 건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렇게 아낀 시간을 요긴하게 사용하냐-하면 별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걷고, 빨리 먹고, 빨리 말한다.

그냥 그게 편해서.


3.

백일이라는 시간은 꽤 길다.

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행도 다녀오고,

책도 많이 읽은 것 같은데

아직 반 넘는 시간이 남아있다.

50일이 넘으면 가속도가 좀 붙으려나.


잘 지내냐는 물음에 잘 지낸다-고 선뜻 답할 수 있을만큼 잘 살고 있지만

때로는 이 멈춤을 끝내고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는 개꿀같은 시간을 보낸다고도 하지만,

빨리 결정하고 빨리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렇게 달지만은 않은 시간이다.


4.

내가 이 백일의 시간이 끝나고 갈 수 있는 방향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길은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는 것.

두 번째 길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

세 번째 길은 나만의 일을 시작하는 것.


최근에 해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현재는 세 번째 길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5.

뭔가 재밌는 생각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곧잘 말해버린다.

말하면서 생각이 더 발전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피드백을 듣는 것도 좋다.


요즘 발전시키고 있는 아이디어는 열광적인 반응과 무덤덤한 반응을 동시에 받고 있다.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려운 것은,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고 말에서 끝나는 것이다.


쉽게 생긴 의욕은 쉽게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차라리 바로 저질러버리면 뭐라도 하련만,

조금 데여봤다고 이리 재고 저리 재본다.


무엇보다 믿을 수 없는 건 나 자신이다.

내 의욕을 믿을 수가 없다.


나중에 쪽팔리지 않으려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실행으로 옮기는 것도 좋을텐데.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을수가 없다.


6.

그동안 많은 결정을 계란후라이 만드는 것처럼 빨리 해치웠다.

그런데 이번 결정은 설렁탕 끓이듯 좀 오래, 미적미적 끌어보려 한다.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고 접는다면 좀 쪽팔릴 것 같기도 하고.

장고 끝에 악수둔다는 말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좀 천천히 해보고 싶다.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뀐다면 바뀌는 것이다.

쪽팔림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뭐.


백일의 끝에 어떤 결정이 있을지 궁금하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달려가서 훔쳐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이 시간을 즐길 수 밖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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