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1.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127p (리디북스 iPad 전자책 기준)
2.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토니는 고등학교 시절 에이드리언 외 2명의 친구와 4명의 그룹을 지어 잘 놀았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베로니카라는 여자와 사귀고, 그녀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둘이 헤어진 후, 에이드리언으로부터 자신이 베로니카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편지를 받는다. 토니는 잘살아라-로 요약할 수 있는 답장을 보낸다. 이후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40년이 지나 손녀를 둔 할아버지가 된 토니는, 어느 날 문득 베로니카의 엄마가 사망하면서 자신에게 500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남겼다는 편지를 받는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일기장을 주지 않는다. 그녀로부터 일기장을 받으려 노력하다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자신이 보냈던 답장이 단순히 잘살아라-가 아니라, 엄청난 저주를 담은 편지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 사이에 정신 지체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그 아들은 베로니카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인 것이 밝혀진다.
결말을 중심으로 요약하자면 '주인공의 친구가 자살했었는데, 알고 보니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 엄마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더라'이다. 이렇게만 써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아침드라마에 비견되는 막장이다. 이런 결말 때문에 이 소설은 반전 소설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보면 꽤나 지루한 면이 많다.
이 소설은 결말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3.
이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에게 가장 다가온 키워드는 '기억'이다. 한 사람의 기억이 사실(Fact)과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에피소드와 문장들로 표현한다. 토니는 자신이 보낸 편지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기억(자기는 쿨하게 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섬뜩한 저주와 비난의 편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다른 형태의 과거를 편지나 일기와 같은 문서를 통해 마주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6p
에이드리언이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라그랑쥬(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역사가;사실은 작가 자신)의 말을 인용해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장이다. 비단 제2차 대전, 프랑스 혁명과 같은 역사책 속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삶 역시 하나의 역사이다. 그리고 개인의 과거 역시 몇몇 사람들의 부정확한 기억과, 어쩌다 남겨진 문서(또는 현대인에게는 사진), 그리고 이를 조합하는 자신의 관점과 해석을 통해 완성된다.
4.
오로지 한 개인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든 별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이 무인도에서 나고 자라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각자에게 영향을 준다. 하나의 사건이 주는 영향도 사람마다 다르고, 그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 역시 다르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이소라의 노랫말처럼.
기억의 무게 역시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원치 않아도 매일 생각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이 되기도 한다.
5.
토니는 베로니카가 전해주는 '불충분한 문서'를 통해 자신이 완전히 잘못 기억하고 있던 과거를 마주한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죽음과 탄생, 평생의 상처에 기여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그가 느끼게 된 감정은 죄책감도 수치심도 아닌, 회한이었다.
회한의 감정.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 붙어 버린 원시적인 감정이다. 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 개선의 여지조차 없는 감정이었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133p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태.
회한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6.
회한을 피하고 싶다고 피해질까.
아무리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산다고 해도, 타인의 역사에 항상 의도한 영향만 주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지 않았어야 할 일을 했고
지금 생각하면 했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늦었다고 생각되면 정말 늦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무력하고
또 무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