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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Sep 05. 2017

D-54. 귀족 생활

귀족이 뭐 별거더냐

1.

첫 번째 직장은 가로수길에 있었다.

2013년 여름에 인턴으로 시작해 2015년까지 다녔는데, 그때의 나에게 가로수길은 직장이 있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삼청동이나 경리단길처럼, 트렌디한 레스토랑이 있는 번화가이다.

점심 시간이 끝나가는 시간에도 각종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동료들끼리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일을 하길래 평일 한낮에 일도 안하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비슷한 경험을 최근 평일 오후에 백화점에 갔을 때 했다.

식당가가 주말 못지않게 붐비고 있는 걸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세상에 일 안해도 되는 사람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주말이나 저녁에 일하고 평일 낮에는 쉬는 직종의 사람일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도 들고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들을 보면서는, 저분들은 육아라는 노동을 수행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2.

매일 매일 일해야 하는 구속을 받지 않고,

쓰고 싶을 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고,

하고 싶은 취미도 가지고 있고,

몸도 건강한 삶.


한시적이지만,

지금 나의 삶이다.


백일의 백수 생활이 어느덧 절반에 가까워지고 있다.

초반에는 지나치게(?) 규칙적이고 뭐든지 열심히 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설렁설렁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은 먹지만 졸리면 다시 자고.

계획을 좀 세웠다가도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고.

그나마 노동이라고는 하루 세끼 중 한끼 정도의 설거지와, 이틀에 한번꼴로 청소기 돌리는 일뿐.

그러면서 결혼 준비라는 명목 하에 쥐고 있는 현금은 꽤 있고.

갑자기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비행기표를 끊어 라오스에 다녀오기도 하고.


3.

문득 이러한 내 삶을 돌아보는데,

이게 바로 귀족의 삶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재밌게 봤던, 근현대 시기 영국 귀족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다운턴 애비>에서 나오는 귀족 할머니가 "귀족은 고용을 창출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어"라고 했던 대사를 생각해보면, 나는 하인 등을 고용하는 삶까지는 아니니까 완벽한 귀족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최근 월말 가계부 정리 후 푸념을 늘어놨던 것처럼,

나는 건물주나 자본가가 아니어서 일 안해도 끊임없이 들어오는 소득도 없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로또 1등에 당첨된다고 한들,

지금의 삶과 크게 달라질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삶을 좀 더 맘편히 길게 누릴 수 있다는 점이 다르려나.


내가 진짜 많은 돈을 가져본 적은 없으니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고작 드라마에서 본 정도로 짐작할 뿐이지만,

나는 현재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구나, 라는 걸 새삼 느꼈다.


4.

나는 돈이 필요하다.

돈으로는 두 가지 자유를 살 수 있다.

첫 번째.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두 번째.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물론 어떤 일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할 수 없을 수도, 해야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꽤 많은 자유를 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 남은 20대는 그동안 모은 돈을 좀 써서라도,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맘껏 누리려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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