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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선 Sep 15. 2017

D-44. 엄마가 해야 할 일

누가 그렇게 정해놓았나

1.

심심하다는 핑계로 청첩모임을 결혼식 3달 전인 8월부터 시작했더니, 이번주부터는 서울에 갈 일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엄마밥을 먹어야 할 일도 많아진다는 걸 뜻한다.

아빠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엄마는 남편밥 챙기는 것보다는 자식밥 챙기는 걸 덜 귀찮아한다.

그래도 역시 눈치는 보인다.

눈치껏 청소기를 돌리거나 설거지를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수동적이라(=엄마가 말해야만 해놔서) 종종 핀잔을 듣는다.


2.

나는 백수고, 엄마는 주부다.

우리의 역할은 종종 겹치거나, 대체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엄마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지만- 이라고 쓰다가 문득, 왜 엄마한테만 그 역할을 수행할 의무가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회사원일 때는 당연히 엄마의 역할이었던 것을,

백수가 된 지금도 엄마의 역할이라고 당연시했다.


이런.


3.

내가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건 청소, 설거지 외에도 다음과 같은 일이 있다.


이번주에 할머니를 수행해야 할 일이 두 건이 있었다.

하나는 수요일 오후에 할머니를 모시고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었고, 하나는 오늘 아침 시골에 내려가시는 할머니를 역까지 데려다드리는 것이었다.


원래 나는 수요일에 서울에 가야했지만 가지 않았다. 그리고 수요일 오후에 엄마가 수행하기로 했던 건강검진 미션은 내 미션이 되었다. 이로 인해 엄마는 아줌마들과 더 오랜 시간 수다를 나눌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 할머니를 역까지 데려다드리는 것도 내가 했다. 이로 인해 엄마는 원래 가셔야 했던 수영 수업에 가실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해서, 엄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나는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은, 이걸 애초부터 '엄마가 해야 할 일'이라고 못박았던 것이다.

엄마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었던 일을 내가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새삼 엄마에게 미안하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시간을 지키고 싶다.

엄마의 수영시간은 존중하고 싶지만, 엄마의 수다시간은 그다지 존중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남은 한 달반의 시간동안,

엄마와의 즐거운 동거를 위해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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