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존슨 '기차의 꿈' '예수의 아들'
클린트 벤틀리의 영화를 본 김에 데니스 존슨의 원작을 찾아 읽었다. 120쪽 남짓되니 중편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영화는 부모를 잃은 그레이니어가 홀로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어린 시절부터 연대기적으로 전개되는데, 소설에선 성인이 돼 벌목꾼으로 일하는 그레이니어가 부지불식간에 인종혐오 범죄에 도움을 줄 뻔한 장면부터 시작한다.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다뤄져 그레이니어의 삶에 오랜 죄책감을 안기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어린 시절부터 연대기적으로 그려지기에 삶의 한 굴곡 정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장면을 도입부에 넣은 소설의 강조점은 좀 더 선명하다. 영화가 이런저런 비극을 겪으면서도 삶을 살아내고 조용히 늙어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은 채 홀로 죽어간 남자의 삶을 서정적, 사실적으로 그려낸다면, 소설의 서사는 비선형적이며 묘사는 종종 비현실을 오간다. 감독 벤틀리는 소설가 존슨보다 좀 더 서정적인 심플함을 추구한다. 아울러 미국 독립영화의 주요 흐름처럼 보이는 슬로 시네마 계열의 정서도 이 각색에 영향을 준 것으로 난 추정한다. 결국 이 소설을 다른 감독이 각색했다면 20세기 초반 미국의 인종주의를 보여주는 영화, 가족을 잃은 남자의 슬픔과 회한이 가득한 영화, 20세기 초반 미국 중하층 남성의 평범한 일생을 파편적이면서도 격렬한 꿈같은 판타지로 그리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벤틀리의 지금 영화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내친김에 존슨의 또 다른 작품집 '예수의 아들'도 읽었다. 소설집 제목을 가진 단편은 실려 있지 않다. '예수의 아들'이란 제목은 루 리드의 '헤로인' 가사에서 따왔다. (벨벳 골드마인의 이 노래를 좋아하지만, 이 가사는 알지 못했다.) 작품 11편 담겨 있다. 책이 190쪽 남짓이니 각 편의 길이가 한국 문학계의 단편 기준으로는 다소 짧음을 알 수 있다.
'기차의 꿈'이 예상 범위 안의 독서였다면, '예수의 꿈'은 다소 충격이었다. 미국 평단에서는 헤밍웨이, 레이먼드 카버,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언급하는 모양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은 잘 모르겠지만, 헤밍웨이와 카버의 영향력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장황하지 않고 간결한 묘사, 성큼성큼 걷다가 목표 지점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문장, 세심히 읽지 않으면 끝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서사 등이 그렇다. 헤밍웨이와 카버가 엄청난 술꾼이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존슨도 마찬가지 같으며 심지어 이 소설집에는 엄청난 마약 냄새도 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화자는 마약과 술에 찌든 익명의 남성으로 추정된다. 11편 작품의 화자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듯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시간 흐름과 사건 묘사가 종잡을 수 없이 파편적이라 화자의 정체성도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마약을 해본 적은 없어서 비유할 수는 없지만 과음한 뒤의 흐릿한 세상 윤곽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화자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일들이 지난밤의 꿈속에서 벌어진 이야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전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다. 화자와 그 주변 대부분 인물이 술과 약에 찌들어 미래도, 계획도 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삶을 처절한 비극으로 그리거나 연민으로 대하거나 폭로하는 건 존슨의 목적이 아니다. 중독자들의 삶은 때로 사실적이지만 때로 깨진 거울에 반사된 먼 과거의 기억 속 이미지 같이도 보인다. 아예 이 모든 작품이 먼 훗날까지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남은 화자가 희미한 기억을 되짚을 때 스며 나오는 회한처럼도 보인다. 존슨을 '작가들의 작가'라고 평한다고도 한다. 통상 이런 표현은 대중에게 덜 알려진 예술가에게 신비감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존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적절하다. 이 작품이 미국 단편 문학의 한 정점이라는 표현도 과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