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을 위하여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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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현대시 산고'(난다)를 읽다. '밤이 선생이다' 등의 산문집과 활발한 SNS 활동으로 유명세를 탄 고인이었지만, '현대시 산고'는 그의 정체성이 성실하고 세심한 불문학자, 번역가, 문학평론가였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킨다. 2012년부터 문예중앙에 연재한 "특히 한국의 현대시에 관해서, 논문도 비평도 아닌 글, 양쪽 모두이면서 어느 쪽도 아닌 글, 내가 읽은 시들이 저절로 말하는 것 같은, 그래서 말이 말을 이어가는 것 같은 그런 글"이다. 저자는 '논문도 비평도 아닌 글'이라고 표현했지만, 오래 살펴오고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언어를 사용해왔던 전공분야이기에, 이 책은 다른 산문집들보다 읽기 어렵다.


지사적이고 올곧은 시인의 이미지에 어긋나는 감상주의 때문에 '안 좋은 시'라고 평가받았던 이육사의 일부 시들을 복권하고, 김수영, 백석, 김종삼. 전봉건 등 옛 교과서에서나 읽었던 시인의 시들을 다시 살핀다. 황현산은 이런 시들에 대한 과거와 동시대 비평가들의 해석을 두루 언급한 뒤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텍스트에 대한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의 접근법들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박서원 시인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다. "시를 배운 적도, 습작을 해본 적도" 없다는 박서원은 "불우한 어린 시절, 자신을 평생 따라다니던 기면증, 어른이 되기도 전에 당했던 성적 폭력의 상처, 불륜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애정관계, 늘 체력을 소모하게 했던 과민한 감각 같은 불리한 삶의 조건들이 모두 새로운 재산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아마 이런 시적 재능은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탁월한 재능과 지속가능성이란 전혀 별개의 것이고, 박서원 역시 재능을 오래도록 안정적으로 꺼내 쓰지 못한 축에 속했다고 보인다. 초창기 빛나는 몇 권의 시집을 냈고, 이후 그저 그런 글을 썼고, 어느덧 문단에서 종적을 감췄던 박서원은 사망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부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말라르메나 아폴리네르, 발레리 등의 시를 번역하는 과정을 담은 글들은 번역은 또 다른 창작이라는 옛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마치 쫓기는 듯 읽었던 시들의 언어와 행간에 이런 의미들이 농축돼 있다는 사실이 다시 놀랍다.


'부기'로 수록된 '젊은 비평가를 위한 잡다한 조언'은 이 책에서 가장 '실용적'인 글일 것이다. 몇 대목만 옮긴다.


비평가가 아직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에 대해 언급하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뒤따른다. 그러나 문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험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백지 앞에 앉아 있을 때, 그가 쓰려는 한 낱말, 한 문장이 다른 낱말, 다른 문장보다 더 낫다고 말해주는 확실한 지표는 아무것도 없다. 한 낱말이 모험이고, 한 문장이 모험이다. 소설가와 시인이 모험할 때 당신도 모험하지 않을 수 없다.

우울증 환자는 어디서나 패배를 본다. 이 패배의식이 어떤 종류의 순결성에 그 밑거름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좋은 소설가가 될 수도 있고 좋은 시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울증으로 좋은 비평가가 되기는 어렵다. 비평가는 자기 앞의 텍스트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다. 당신이 읽는 모든 것이 쓸모없어 보인다면 그것은 당신이 엄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태하기 때문이며, 당신이 상상했던 것과 세상이 다르다고 떼를 쓰는 식의 유아적 분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늘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그의 감식안을 흐리게 하여 좋은 작가와 나쁜 작가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결정해버리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



작가의 여러 재능 가운데 가장 특별한 재능은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는 재능이다.

온갖 재능의 사치는 생명의 행복을 증명하지만, 제 재능이나 남의 재능이나 재능이 거기 있음을 보고 행복할 줄 아는 능력은 생명의 위엄을 증명한다. 비평가인 당신은 그 위엄을 자신의 직능으로 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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