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화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by myungworry

'The Remains of the Day'를 '남아있는 나날'로 번역하는데 대해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날의 유물' 정도가 적당하다는 주장도 있고, 현재의 번역 제목도 크게 틀리지 않다는 반대 주장도 있다. 민음사 측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현재의 번역 제목을 협의했다고 밝혔으니, '오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만 나는 '시대의 유물' 정도가 책의 뉘앙스에 맞는다고 느낀다. 이 책은 2차 대전과 전후를 거치며 영국 전원 달링턴 대저택의 집사로 일한 스티븐스의 회고담이다. 영국 외교가의 거물이었던 이전 주인 달링턴은 타계했고, 현재는 영국의 전통을 존중하지만 조금 더 실용적으로 보이는 미국 주인이 이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시대의 유물'로 번역한다면 스티븐스가 전쟁 전의 신사적이고 동정 가득한 영국 기풍을 마지막으로 간직한 유물이라는 점에 중점을 둔 것일 테고, '남아있는 나날'로 번역한다면 늙은 집사장 스티븐스가 새 미국 주인에게 봉사하는 여생을 강조하는 말일 테다. 스티븐스의 여생의 다짐에 대해서는 책 마지막에 잠깐 나오니까, 난 전자의 번역을 선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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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링턴 홀에서 스티븐스와 호흡을 맞추며 오래 일하다가 결혼과 함께 일을 그만둔 켄튼을 만나기 위해 스티븐스가 여행을 가며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화자 스티븐스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스티븐스와 켄튼 사이엔 미묘한 감정 흐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스티븐스보다는 조금은 더 감정적인 켄튼의 말로 더욱 확실해진다. 스티븐스는 켄튼이 보낸 편지를 통해 켄튼이 현재의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래서 다시 달링턴 홀로 데려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스티븐스는 켄튼의 능력은 달링턴 홀을 꾸려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영입 작업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켄튼은 소설 종반부 스티븐스와의 만남에서 둘 사이에 연애의 감정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이에 대해 스티븐스는 딱히 반박하지 않는다. 켄튼이 남편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했음을 확인했기에, 스티븐스의 영입 작업은 실패로 돌아간다. 스티븐스는 '남아있는 나날'을 보내기 위해 달링턴 홀로 돌아온다. 켄튼과의 연애 감정을 독자에게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스티븐스는 '믿을 수 없는 화자'다.


스티븐스가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건 집사 일에 대한 그의 모순적인 태도와도 맞닿아있다. 스티븐스는 수차례 달링턴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은 영광이었다면서도 그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전후 영국인들과 대화하면서는 달링턴과의 관계를 솔직히 밝히지 않고 그를 변호하지도 않는다. 외교 거물로서 달링턴이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맺으며 벌인 실책을 두고 비판이 이어지자, 자신은 아무런 영향이 없는 집사였을 뿐이었다고 항변한다.


내가 그분(달링턴)을 모셔 온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 오늘날 나리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외교관의 집사는 집사일 뿐 외교관이 아니므로 스티븐스의 언명은 지극히 온당하지만, 스티븐스가 달링턴과의 관계를 줄곧 자랑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스티븐스가 유대인 하녀를 해고하라고 지시했을 때, 이에 부당함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항의한 켄튼과 달리 스티븐스는 그저 달링턴의 지시를 이행하는데 신경 썼을 뿐이다. 일에 담긴 가치를 평가하지 않고 일이 잘 이행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관료적인 무심함 혹은 무사고가 스티븐스 행동의 요체다. 그걸 집사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고,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무사유라고 할 수도 있겠다.


책 표지에는 달링턴을 '나치 지지자'라고 못박았지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것은 아니다. 달링턴은 '패자를 괴롭히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는 고전적, 신사적인 외교관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달링턴은 1차 대전에 패배한 독일을 쥐어짜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일이며, 이는 향후 유럽의 평화에도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전후 성공적인 복구에 실패한 독일에서 극우 포퓰리스트 히틀러가 등장했기에, 달링턴의 관점은 어느 선에서는 타당하다. 다만 히틀러의 실체를 이른 시기에 파악하지 못했고, 줄곧 나치 독일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달링턴의 실수를 지적할 수는 있겠다. 물론 이러한 규모의 '실수'는 개인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는 점이 문제다. 달링턴 홀의 대규모 외교행사에 참석한 한 미국인이 상대의 선의를 믿는 달링턴을 '아마추어'라고 평한 것은 정확했다. 현대국가의 일에 아마추어가 끼어들 공간은 없다.



Kazuo_Ishiguro_in_Stockholm_2017_02.jpg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추석 때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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