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하얼빈'
출판사 문학동네는 김훈의 신작 장편 <하얼빈>이 "<칼의 노래>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표작"이라고 홍보한다. 김훈은 기자회견장에서 "쑥스럽다" "넘어섰는지 그 안에서 주저앉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넘어섰느냐 넘어서지 못했느냐 주저앉았느냐 이런 것들은 매우 과학적이지 못한 언사라고 생각한다"며 얼버무렸다. <하얼빈>이 <칼의 노래>를 넘어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대표작'이라 부르는데 부족함은 없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순신에 이은 또 한 명의 영웅 안중근을 그리는 소설이다. 김훈은 젊은 시절부터 안중근에 대해 써보기로 마음먹었으나 밥벌이에 고단하고 쓸 자신도 없어 "필생 방치"하다가, 몸이 아프고 글 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정신이 들어 <하얼빈>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은 의외로 안중근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의 시선으로부터 먼저 시작한다. 일본의 정신적 권력자 메이지와 그의 권세를 뒤에 업은 실질 권력자 이토가 조선을 복속한 뒤 동북아 질서를 좌우하려는 의도와 마음가짐을 먼저 묘사한다. 다음 챕터에 안중근이 나오고, 이후 안중근이 이토를 죽이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둘의 활동과 생각이 한 챕터마다 번갈아 묘사된다. 이토는 조선인 입장에서는 '원수'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현대 국가의 초석을 다진 대정치가다. 이토가 꿈꾸는 것은 일종의 '팍스 자포니카'다. 무력으로 구 강대국 중국, 러시아를 차례로 물리친 일본은 아이 손목 비틀듯 손쉽게 손에 넣은 한반도를 발판 삼아 동북아 질서의 기틀을 잡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외견상 목적을 내세운다. 왕이 끝내 저항하다가 죽거나 나라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일은 있어도, 조선처럼 왕과 신하들이 스스로 문서에 도장 찍어 국권을 넘기는 일은 처음 봤다고 이토와 일본인들은 내심 비웃는다. 그러나 이렇게 깔보는 마음을 드러내진 않는다. 이토와 일본은 어디까지나 '문명'의 가면을 쓴다. 하얼빈까지 순회하는 와중에도 일본에 패전한 중국, 러시아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전쟁은 지났고 평화의 시대가 열렸으니 옛 원한은 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 이토와 일본의 주장이다. 물론 이 질서와 평화는 일본의 영향력을 '열복'(기쁘게 받아들임)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안중근은 이토가 주장한 일본 중심 질서와 평화에 동의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수많은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왕과 신하들이 국권을 손쉽게 넘겨줬으나, 그 백성들과 일부 유생들이 들불처럼 들고일어나는 사태를 이토와 일본인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조선의 백성들이 지키려 했던 것이 무능하고 유약하고 국제 정세에 어두워 결국 국권을 빼앗긴 왕가의 정통성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아마 그들에겐 500년 이어진 조선 왕가를 넘는 강력한 상징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이나 조선이라는 이름은 그저 조선왕조 500년을 넘어 수천 년간 한반도에서 이어진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안중근이 이토를 죽이려고 마음먹는 과정은 급작스럽다. 김훈은 이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안중근이 공범 우덕순과 살해를 모의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둘은 이토를 죽이려는 이유를 상세히 말하지 않는다. 이토를 죽이겠다는 뜻을 공유하면 그뿐이라는 듯, 별다른 말 없이 암살이라는 최종 목적에만 천착한다. 조선 백성에게 이씨 왕가가 상징이었듯, 안중근과 우덕순에게도 이토가 상징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이토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국권을 침탈하고 이웃 백성을 죽이면서까지 자신들의 '질서와 평화'를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강제력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토와 일본의 세계질서에 순순히 복속했다면, 지금 '미국인'이 된 태평양 지역의 섬사람들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안중근과 그 동지들은 비록 가난하고 혼란스럽게 살더라도 남이 가져다주는 질서와 평화의 체제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를 죽임으로써 그 자존심의 말을 세상에 알릴 기회를 찾으려 한다. 그냥 말해서는 세상이 들을 리 없고, 이토를 죽인 뒤 말해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귀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총을 쐈지만, 총알은 곧 말의 현현이었다. 김훈은 종종 언어의 무력함을 말하지만, 안중근을 총으로 말하려 했던 사람으로 그린다는 점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殺)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