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필의 '놉'
**스포일러 있음.
조던 필의 세번째 장편 '놉'은 야심작인가, 실패작인가. 전자를 택한다면 최고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야심만만하고 창의적이었다는 평가일테고, 후자라면 야심이 지나쳐 영화를 이상한 곳으로 이끌었다는 평가일테다. 어쩌면 야심작과 실패작 사이 명확한 경계는 없는지 모른다. 만일 실패작이라도 나는 야심이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야심 없이 실패한 영화는 정말 봐주기 힘들다.
'놉'을 명확히 '성공작'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조던 필이 이 영화를 통해 추구한 목표가 여전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조던 필의 목표가 순수히 시네마틱한 공포 경험이었다면 성공작이다. '놉'에서처럼 광활한 미국의 평원과 그 하늘에서 비롯된 공포를 그린 영화는 본 적이 없다. 그건 오직 미국 영화, 그리고 극장에서의 관람 경험을 통해 최적으로 충족되는 조건이다. 하지만 조던 필이 오직 시네마틱한 공포 경험을 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사람은 시네아스트이기 이전에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겟아웃).
내러티브는 이상하면서도 단순하다. 영화 촬영용 말 농장을 운영하는 남매의 머리 위로 괴상한 비행체가 나타난다. 이 비행체는 지상의 생물을 잡아삼킨다. 다른 SF나 공포 영화에서였다면 당장 정부 비밀기관이 출동할텐데, '놉'에서 공권력은 이상하게도 멀다. 남매는 상공의 비행체를 신고하거나 기지를 발휘해 이기려 하기보단, 그것의 모습을 정확히 촬영해 유명해지려(혹은 큰 돈을 벌려) 한다. 물론 그 일은 쉽지 않다.
UFO 정도로 여겨지던 비행체는 사실 생명체였다.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나올 법한 공포스럽고 거대하고 추상적인 괴물이다. 그것이 구름 속에 숨어 있다는 설정이 놀라울 따름이다. 남매는 말이라는 동물을 생계 수단으로 일한다. 인근 테마 파크를 운영하는 아역 배우 출신 남자는 과거 침팬지와 얽힌 끔찍한 경험이 있다. 인간이 길들인 것으로 혹은 적어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은 인간과 전혀 다른 논리 체계를 지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무시무시해질 수 있는 존재인 동물에 대한 이야기인가.
남매는 영화의 원형 중 하나로 평가받는 마이브리지의 달리는 말 연속 사진 속 흑인 기수가 자신의 조상이었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영화의 초창기를 연 뿌리 깊은 영화인 가문이라는 뜻이다. 영화인 가문의 후손답게 이들의 사고는 영화적, 미디어적이다. 위에서 말했듯 하늘의 괴물을 잡으려하기보단, 그것의 영상을 정확히 포착하려 한다. 이를 위해 갖가지 특수 장치를 활용하고, 실력있는 카메라맨을 초빙한다. 공포영화 주인공 중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쫓아오는 살인마에게 흉기로 반격하거나 귀신을 퇴마하기 위해 주술사를 부르는 대신, 살인마나 괴물을 영상에 담는 것으로 반격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놉'은 영화 매체의 권능에 대한 찬사인가, 노력하는 영화인에 대한 존경인가.
관객이 큰 노력 없이 받아들일만한 메타포를 던지던 조던 필은 '놉'에서는 시적이고 추상적인 메타포를 사용했다. 관객이 메타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영화적 경험만으로 만족한 채 극장을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