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의 유산'과 '스마일리의 사람들'
지난달 별세한 존 르 카레의 2017년작 '스파이의 유산'(열린책들)을 읽다. 이언 플레밍에게 제임스 본드가 있다면, 르 카레에겐 조지 스마일리가 있다. 그 스마일리가 27년 만에 돌아온 책이다.
'스파이의 유산'은 1963년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시퀄이다. 당시 베를린 장벽에서 죽은 스파이와 그 연인의 유족들이 영국 정보기관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은퇴한 뒤 한적한 프랑스 시골 자택에서 시간을 보내던 피터 길럼이 기관의 요청으로 송환된다. 당시 작전의 서류가 대부분 폐기되거나 사라져서, 작전에 관여했던 길럼이 필요했던 것이다. 길럼은 서류상으로 성공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실패했던 당시 작전의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조금씩 떠올린다. 국가의 승리와 기관의 영속을 위해 벌어졌던 작전이 그것을 실행하는 인간들에게 어떠한 괴로움을 안겼는지 드러난다.
길럼은 당시엔 말단 실무 요원이었다. 그리고 소설 종반부 전설의 스마일리가 마치 유령처럼 등장한다. 스마일리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상을 찌푸리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는다." 은둔한 현인처럼 행동한다. 그러면서 당시 일들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우린 무자비하지 않았어, 피터. 한 번도 무자비했던 적이 없네. 더 규모가 큰 연민을 품었을 뿐이지.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할 수는 있네. 우리의 연민이 소용없었던 건 확실하니까. 이제는 그걸 알겠어. 하지만 그때는 몰랐지.
르 카레는 스파이 장르 사상 가장 현명하고 침착한 스마일리의 입을 빌려 냉전 시대의 첩보전을 회고한다. 스마일리의 발언은 반성 같기도 하고 변명 같기도 하다.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관료의 발언처럼도 들리고, 그런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에 대한 정직한 토로 같기도 하다.
내친김에 과거 스마일리와 소련 정보기관 소속 카를라의 대결을 그린 3부작 중 마지막인 '스마일리의 사람들'(알에이치코리아)도 읽었다. 1979년작인 이 소설에서도 스마일리는 이미 은퇴 상태였다. 과거 스마일리가 관리하던 소련 출신 정보원의 죽음과 함께 은퇴했던 스마일리가 다시 불려온다. 스마일리는 과거 오랜 시간 일했으나 이제는 떠난 지 오래된 직장을 오가며 옛 경험과 새 상황을 아울러 사건의 배후를 찾아간다. 스마일리 최대의 라이벌이자 과거 스마일리에게 굴욕을 안겼던 카를라의 약점을 조금씩 캔다. 카를라를 무너뜨리는 건 예상치 못한 그의 인간적 약점이었다. 스마일리는 결국 이겼지만, 승리를 만끽하지는 않는다.
서문에서 르 카레는 '스마일리의 사람들'이 BBC 드라마로 방영된 이후의 심정을 흥미롭게 전한다. 알렉 기네스가 연기한 조지 스마일리는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네스가 출연한 드라마가 끝난 뒤 르 카레는 "스마일리가 독자들한테 넘어갔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고 말하고, "알렉과의 관계가 끝나고 캐릭터를 돌려받았을 때, 어쩐지 난 중고품을 받는 기분이었다"고도 말한다. 게다가 스마일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고루해지고 변화를 고통스러워해서, 10편이든 15편이든 쓰고 싶었던 스마일리의 이야기를 3편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1979년에도 늙고 지쳤던 스마일리를 2017년에 짧게나마 다시 불러낸 이유는? '스파이의 유산' 종반부에 등장한 스마일리는 정말 유령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