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드릴로 '화이트 노이즈'
미치코 가쿠타니는 돈 드릴로를 두고 "최근 역사가 보여주는 기묘한 초현실을 돈 드릴로보다 더 잘 인식하고 주목한 미국 소설가는 없었다"고 평했다. 예전에 <코스모폴리스>(2003)를 읽으려다 포기한 경험이 있었지만, 가쿠타니의 평에 고무돼 곁에 있던 <화이트 노이즈>(1985)를 집어 들었다.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다. 산업화된 사회의 남성 지식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필립 로스의 소설과 달리, 드릴로의 소설은 미국인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텔레비전, 냉장고 등에서 나오는 소음을 일컫는다. 일정한 패턴으로 들려오기에 아기 재울 때 들려주면 좋다는 말도 있다. 드릴로의 소설에선 미국 중소도시에 살면서 '히틀러학과' 교수로 일하는 남성 잭 글래드니와 그 가족, 친구를 둘러싼 미국의 현대 문화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소음은 소음인데, 항상 그곳에서 들렸기에 의식하지 못하는 소음. 아울러 이 소음은 인물들을 감싸고 도는 죽음의 공포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현란하게 풍자적이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아 바움벡의 영화 예고편에서 본 애덤 드라이버와 그레타 거윅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자꾸 떠오르기도 했다(본편은 아직 못 봤다. 소설 관련 영상을 먼저 접하면 이런 '부작용'도 있다). 히틀러학과니,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해주는 실험적 약물이니 해서 웃기긴 한데, 그 웃음은 물론 냉소에 가깝다. 잭은 명색이 히틀러학과 창시자인데 독일어를 못해 몰래 과외를 받는다. 잭의 아내 버벳은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해주는 실험적 약물 다일라를 얻기 위해 연구자와 섹스한다. 이를 안 잭은 분노에 떨지만,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은 채 단지 '미스터 그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 연구원에 대한 온갖 상상에 사로잡힌다. 여느 소설에서라면 따로 장편으로 빼서 쓸만한 에피소드가 몇 개 등장한다. 드릴로는 이 에피소드들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고 다음 사건으로 넘어간다. 심지어 유독가스가 유출돼 주민들이 모두 대피하고 잭은 가스에 노출돼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받지만, 이조차 시간이 흐르고 대수롭지 않게 처리된다. 물론 잭은 안절부절못하고 오두방정을 떨지만, 이 소동을 서술하는 드릴로와 이를 읽는 독자는 잭의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구경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대수롭지 않을 리가 있나. 드릴로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잭과 그 가족들이 조금 불쌍할 뿐이다. 역자는 부부의 어린 아들 와일더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를 위험천만하게, 그러나 무사히 가로지르는 마지막 장면을 "'화이트 노이즈'로 가득 찬 이 허상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작가의 바람이 은밀하게 깃들어 있다"고 해석했지만, 난 우리의 삶이 그렇게 우연히, 간신히 지탱된다는 드릴로의 이죽거림처럼 느껴졌다.
"참 이상한 일이야.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깊고 끔찍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게. 그래도 우린 돌아다니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먹고 마시지. 그럭저럭 제 구실들은 하고 산단 말이야. 그 감정은 너무나 깊고 생생해. 그럼 그 감정이 우릴 마비시켜야 되는 것 아냐? 어떻게 우리가 그걸 이기고 잠시라도 살아남을 수 있어? 차를 몰고, 강의를 하면서 말이야. 어젯밤에, 그리고 오늘 아침에, 우리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본 사람이 어떻게 아무도 없을까? 그건 우리 모두가 상호묵인 하에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그런 것일까? 아니면 우리도 모르게 똑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건가? 똑같은 가면을 쓰고."
"죽음이 단지 소리일 뿐이면 어쩌지?"
"전기 소음이지."
"그 소리가 끝없이 들려. 사방에서 들려와. 아, 끔찍해."
"균일한 화이트 노이즈."
"하고 싶은 게 아니냐,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지. 내 삶은 이제 더이상 하고 싶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숨차게 헐떡거리는 거. 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왜 그러는지 이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