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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진 않지만...

최진영 '구의 증명'

by myungworry

지난해였나 교보문고에서 낯선 책이 '베스트셀러' 매대에 올라와 진열된 모습을 봤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이었다. 최진영 작가의 이름은 들어본 적 있지만, 그의 책이 이렇게 잘 팔리는지는 몰랐다. 내가 서울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33쇄다. 인기가 많아서 예약을 하고도 한참 기다린 끝에 빌려볼 수가 있었다.

드라마에 나왔거나, 인기 있는 유튜브에서 추천한 책도 아니다. 최진영의 매일경제 인터뷰를 읽어보니 2015년 출간된 뒤에도 그다지 큰 인기를 얻은 것은 아닌데, 뒤늦게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가 자신도 "어리둥절했다"고 표현한다.

표면적으로는 '담'이라는 여성이 객사한 연인 '구'의 시신을 가져와 이 시신을 먹는 이야기다. 잔혹하고 엽기적인데, 막상 읽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구의 증명'은 곡진하고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담의 행동은 실제로 구의 시신을 먹는다기보다는, 죽은 연인의 신체를 한 부위씩 어루만지며 그와의 생전 추억을 되새기는 행위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구의 증명'은 공포가 아닌 멜로물이다.

둘의 처지가 서글프다. 둘은 극빈층은 아니지만 차상위계층에는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 설정이 절묘하다. 담은 부모가 아닌 이모와 함께 살았다. 이모는 좋은 사람이었다. 담을 아끼며 돌보아 주었지만, 담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주거나 담이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접어들 때까지 살아서 지켜봐 주지 못했을 뿐이다. 구의 처지는 담보다 좋지 않다. 부모가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구를 학대하거나 방치한 것은 아니지만, 잇단 불운 혹은 무능으로 구에게 큰 빚을 남긴 뒤 잠적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구는 짐작한다.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분명한 악당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구가 어디로 가든 알고 찾아오는 사채업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인격화된 존재라기보다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아마 '구의 증명'이 영상화된다면 이 사채업자에 어떻게든 악당 연기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해야겠지만, 적어도 소설에서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구조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옛 시인이 노래했지만, 가난하면 확실히 사랑하기가 어렵다. 옛 시인이 시를 지었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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