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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혁명, 진보의 원뜻

윤혜준 '근대 용어의 탄생'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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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사, 용어사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야마모토 마카미쓰의 '그 많던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쓰는 개념어의 원천이 서양 문물을 앞서 수입한 일본이라지만, 아무래도 일본 용어의 역사가 한국 독자에게 직접적 흥미를 주진 못했다. 그런 면에서 윤혜준의 '근대 용어의 탄생'(교유서가)은 야마모토 다카미쓰의 책보단 잘 읽히고 흥미로웠다. 저자는 19세기 영국소설, 18세기 영국지성사를 연구한 영문학자다. 알파벳 순으로 아메리카, 비즈니스, 자본주의(capitalism)에서 시작해 교통(transportaion), 대학(university), 유토피아를 설명하며 끝을 맺는다. 각 용어의 한국 용례와 그것이 한자어로 번역되기 전의 서양, 특히 영국 용례를 비교한다.

예를 들어 '혁명'은 동아시아 정치사상 개념의 하나인 '역성혁명'의 줄인 말인데, 'revolution'은 어원을 따지면 획기적인 정치적 격변과는 크게 상관없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라틴어 어원 'revolutus'는 '전진'이라기보다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이라고 한다. 'revolution'은 전에 없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기보다는, 과거 있었으나 어떤 사유로 사라져 버린 그래서 아쉬운 질서를 회복한다는 뜻에 가깝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번역되는 'president'의 원뜻도 흥미롭다. '대통령'을 한자 뜻대로 풀면 '크게 거느리고 다스리다'라는 뜻이겠지만, 'president'에 그토록 강한 권력은 없다. 같은 'president'라도 중국인들은 '총통'으로 옮겼다. 'president'는 한 조직을 대표하는 행위를 뜻하긴 하지만, '다스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에 가깝다. 애초 일본인들이 'president'를 '대통령'으로 번역한 이유는 개항 당시 미국 행정부의 총책임자가 'president'였기 때문이다. 일본을 강제로 개항하게 만들 정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을 '대리인'이나 '의장'으로 생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바이든의 직함 역시 '미합중국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아메리카의 주 연합 의장'이라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저자는 본다. 그를 '대통령'이라 부르는 순간, 삼권분립을 위해 미국인들이 고안한 온갖 제약과 장치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progress'는 '진보'라고 번역되지만, 애초 이 말은 진행하는 코스, 지적인 개선 정도의 어감을 가졌다. 1732년 나온 '매춘부의 진보'라는 그림 시리즈는 일자리를 찾아 런던에 온 젊은 여성이 포주에 속아 부유한 상인의 파트너가 됐다가 성병에 걸려 죽는 과정을 그렸다. 여기서 '진보'는 '과정'일뿐, '앞으로 나아가다'는 뜻은 갖고 있지 않다. 진보가 '사회적 진화'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허버트 스펜서 같은 19세기 중반 진화론자의 등장 이후였다고 저자는 본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많다. 저자가 깊게 드러내진 않으려는 듯 보이지만, 한국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한 중도보수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시선도 담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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