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
나는 스토아주의자다. 아니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편이다. 학부 시절 철학을 전공했지만, 학문이나 개념으로서의 철학은 이제 내 관심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철학은 삶의 지침이어야 한다. '자기 계발'이라고 낮춰 불러도 별 불만은 없다. 스토아 철학은 내게 삶의 지침이자 자기 계발로서의 철학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이자 황제였다. 흔히 '명상록'이라 알려진 그의 글은 학자 혹은 대중을 위한 출판이 아니라 온전히 개인의 인생을 기록한 '철학적 일기'였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그린비)는 헬라스어 원전 번역이자 '명상록' 대신 원제를 그대로 붙인 판본이다. '명상록'을 부분적으로 읽어본 적이 있으나, 이번에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을 구한 김에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보기로 했다. 이런 독서경험 역시 스토아적이라고 자칭해 본다. 기억할만한 구절들.
어떤 사람도 그(막시무스)에게 경멸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이 그(막시무스)보다 우월하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았다.
운명이 인생을 쾌적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그에게 넉넉하게 주었지만, 그것을 자랑하지도, 동시에 변명하지도 않고 사용하고, 그런 것이 있을 때는 거리낌 없이 누리고, 없을 때는 별로 원하지 않았던 것.
공동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너의 여생을 낭비하지 마라.
갑자기 누군가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어도 즉각적으로 솔직하게 '이것'이나 '저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생각만 하도록 자신을 습관 들여야 한다.
우리 각자는 오직 현재, 이 한순간에 불과한 현재만을 산다는 것을. 인생의 나머지는 이미 살아 버렸거나 아직 알 수 없는 미래에 속한다. 그러므로 각자의 일생은 작고, 그가 사는 지상의 한구석도 작다. 또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사후의 명성이라 할지라도 작으며, 그것도 신속하게 죽어 가는 작은 인간들이 차례차례 이를 이어 가는 데서 비로소딘 것일 뿐이다.
이 사람들은 시골이나 해안, 산에다 물러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너 또한 그런 곳을 열렬히 동경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지극히 속된 사고방식이다. 너는 네가 원할 때마다 너 자신의 내면으로 물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곳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영혼 안보다 더 평화롭고 한적한 피신처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주는 변화고 인생은 믿음이다.
요컨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이 얼마나 덧없고 하찮은 것인지 끊임없이 주목해야 하나. 어제는 약간의 점액이었다가, 내일은 미라라든가 재가 된다.
가장 좋은 복수의 방법은 자신도 적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명성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좋음이 타인의 행위 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그 좋음이 자신의 감정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성을 가진 자는 그 좋음이 자신의 행동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친숙한 것이요, 일시적인 것이다.
옛날에 크게 찬양받던 얼마나 무수한 사람들이 이미 망각에 빠져버렸는가! 그리고 이 사람들을 찬양하던 얼마나 무수한 사람들 역시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는가!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든 사람이 너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완전한 성품의 특징은 모든 날을 마치 자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보내며, 동요도, 냉담함도, 위선도 없다는 데 있다.
네가 어떤 외적인 것으로 괴로워한다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관한 너의 판단이다.
격정으로부터 해방된 정신은 하나의 성채다. 일단 그곳에 피난하면 이후 난공불락으로 인간에게 그보다 안전하고 견고한 장소는 없는 것이다.
'이 오이는 써요.' 던져 버려라. '길에 가시나무가 있어요.' 그것을 피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이런 것이 세상에 있을까요?'라고 덧붙이지 마라.
현재 있는 모든 것은 모조리 우리가 무덤에 묻었던 사람들의 시대에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