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와 '애니'
에르난 디아스의 장편소설 '트러스트'는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린" 사람인 앤드루 베벨의 이야기다. 아니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의 시각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현실을 구부리는 수단은 '돈'이다. 선대의 담배 사업에서 금융업으로 방향을 튼 그는 활황기에도 돈을 벌고 불황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 활황기에 돈 버는 데는 대부분의 사람이 불만을 갖지 않지만, 불황기에 돈을 벌면 그만큼의 시기와 비난이 뒤따른다. 금융업은 불황기에도 돈을 벌 수 있는 몇 안 되는 업종인데도 불구하고, 베벨은 남들의 불행을 이용해 돈을 번다는 비난을 받는다.
해럴드 배너라는 평균 수준의 작가가 쓴 소설 속 소설 '채권'이 서두를 연다. 이어서 베벨의 자화자찬 일색의 자서전 '나의 인생'이 이어지면 독자는 조금 어안이 벙벙하다. 배너의 소설 속 벤저민 래스크는 누구이고, 갑자기 튀어나온 베벨은 누구인가. 배너의 자서전 집필에 관여한 여성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록을 기억하며'까지 읽으면 '트러스트'의 구성이 명확해진다. 배너는 베벨의 삶을 모델로 '채권'이라는 소설을 썼고,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격분한 베벨은 파르텐자와 함께 끝내 완성하지 못한 자서전을 써내려갔다. 파르텐자가 보기엔 배너의 소설이나 베벨의 자서전이 모두 온전한 진실을 담지 않는다. 물론 파르텐자조차 마지막 진실의 한 조각까지 알지는 못한다는 점은 베벨의 부인인 밀드레드의 '선물'이라는 일기에서 드러난다.
'트러스트'는 2017년 '먼 곳에서'로 데뷔한 디아스의 두 번째 장편이다. 퓰리처상을 받았고 부커상은 후보에 올랐다. 그때 부커상 수상작은 얼마나 뛰어나기에 이 작품을 제쳤을까. 심지어 '트러스트'는 롱리스트에 올랐을 뿐, 쇼트리스트에는 오르지도 못했다. 돈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의 내면과 가치관, 그를 둘러싼 시선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읽어나가는 재미가 상당하고, 20세기 초반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것을 만들어간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흥미진진하다. 언젠가 일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으로 나오겠지. 그들에 대한 논픽션보다는 픽션이 궁금하다.
공교롭게 최근 본 뮤지컬 '애니'도 미국의 20세기 전반기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에도 엄청난 부자 워벅스가 나온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언제든 통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다. 1924년 연재된 만화를 1976년 초연했으니, 2024년 보기엔 시차가 있는 셈이다. '요즘 정서에 안 맞는다'고 생각한 뒤 넘어갈 게 아니라, 무엇이 왜 안 맞는지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 일단 미혼의 중년 남성이 크리스마스 자선용으로 고아 소녀 애니를 자기 집에 초대해 몇 주 간 머물게 한다는 설정부터가 요즘이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이 계획은 워벅스가 아니라 그의 비서가 추진한 것으로 돼있긴 하다.) 어떤 슬프고 불운한 상황에서도 당차고 활력 넘치는 초긍정 인간 애니는 친필 편지와 반쪽짜리 목걸이를 남긴 채 자신을 고아원에 버린 부모를 찾기 원하는데, 워벅스는 FBI까지 마음대로 동원하며 애니 부모를 찾으려 한다. 베벨이 이기적인 방향으로 현실을 구부렸다면, 워벅스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구부렸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까. 루스벨트와 만난 애니가 초긍정의 기운을 불어넣어 뉴 딜 같은 국가 정책의 실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건 '포레스트 검프'풍이다. 애니와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 같이 그의 초긍정 에너지에 영향받아 사람이 바뀐다. 이러면 애니는 현실감 있는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희망을 거칠게 의인화한 토템 같이 보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