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니 에르펜베크 '카이로스'
카타리나와 한스가 1986년 7월11일 동베를린의 버스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둘은 각각 19세, 53세였다. 카타리나는 미혼, 한스는 기혼이었다. 둘은 나이 차가 무색하게 곧바로 서로에게 빠졌다. "그게 전부였다. 모든 것이 마치 정해진 것처럼 그렇게 되었다."
한스에겐 아내와 아이가 있다. 혼외 관계는 카타리나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스는 이 연애의 포식자다. "우리는 가끔만 볼 수 있어. 하지만 매번 첫 만남 같을 거야."라고 말한다. 카타리나는 이런 말에도 만족한다. "삶은 이제 시작되었음을, 다른 모든 것은 그저 준비에 불과했음을."이라고 말할 정도다. 카타리나의 부모와 친구들 모두 이 관계를 못마땅해하는 눈치다. 카타리나는 개의치 않는다. 한스와 함께 있을 때 행복했으니까. 둘은 간이 결혼식을 치르고, 아이를 가질 생각도 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명확히 모르는 채.
물론 둘의 관계는 순탄히 흘러가지 않는다. 도덕 관념이나 사회의 시선 때문이 아니다. 작가 한스는 방송사에서 일한다. 꽉 막힌, 정태적인 사회주의 사회에서 중년 한스의 삶의 궤적이 크게 변할 리 없다. 동독 사회가 아니더라도 중년 남자의 삶은 대체로 그러할 것이다. 카타리나는 다르다. 학업과 직업, 성향과 감정의 변화에 따라 삶에 여러 가능성이 생긴다. 카타리나는 다른 도시로 가서 극장에서 일하다가 동년배 남자와 잠시 눈이 맞는다. 한스가 이를 알아채자 카타리나는 곧 잘못을 시인한 뒤 사과한다. 한스는 카타리나의 잘못을 빌미로 삼아 지속적으로 벌을 준다. 한스는 정신적으로 카타리나를 KO 직전까지 몰고 간다. 카타리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주눅 들어 한스의 벌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한다. 한스와 카타리나의 날카롭던 관계는 조금씩 변한다. 사회의 변화가 이 관계 변화도 추동한다. 평생 영원히 일할 것 같았던 직장에서 한스는 쫓겨난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의 일이다. 많은 동독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타리나에게도 조금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진다. 물론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지만. 자유는 생각의 폭도 넓힌다.
작가가 묘사하는 통일 전 동독의 모습은 우울하다. 통일 후 모습은 쓸쓸하다. 카타리나가 한스의 처벌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듯, 동독 사람들도 자본주의의 거센 파도에 힘없이 휩쓸린다. 카타리나와 한스의 관계는 이 파도 속에 흐지부지된다. 단지 세월 때문인지, 통독 때문인지, 둘의 성격이 변했기 떄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비율로 따지기는 어렵지만, 세 가지 요인이 모두 작용했을 것이다.
초반부 끓어올라 중반부 위험해지고 후반부 급격히 식는 사랑 이야기다. 간혹 이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독자가 어찌 생각하든, 카타리나와 한스에겐 사랑이었을 것이다. 다르게 부를 이름도 없다. 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고, 어느 모습이 진짜인지는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으니까.
에필로그에서 급격히 한스의 정체를 밝힌 작가 의도가 궁금하긴 하다. 내가 앞선 400페이지에서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독 사회의 진짜 모습을 개인에 투영하려는 것일까. 굳이 그런 설정이 필요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을 받은 이유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