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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여자들

'백엔의 사랑'과 '러브 라이즈 블리딩'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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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중에 넷플릭스에서 찜해 두었던 영화를 두 편 봤다. 영화관에서 볼만한 영화가 없기도 했다. 선택한 영화는 '백엔의 사랑'과 '러브 라이즈 블리딩'. 다케 마사하루가 연출하고 안도 사쿠라가 주연한 '백엔의 사랑'은 2014년작, 로즈 글래스가 연출하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케이티 오브라이언이 주연한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2024년작이다. 둘 다 여성 주인공이고 딱 10년 간격이다. 일부러 찾아본 것은 아니고 우연이다.

우연치고는 흥미로운 대비였다. '백엔의 사랑'은 인생에 의욕이 없는 32세 여성 이치코가 주인공이다. 직업은 없고 주로 조카와 게임을 하며 지낸다. 1층에는 엄마가 운영하고 여동생이 돕는 도시락가게가 있지만, 이치코는 일을 돕지 않는다. 여동생과 대판 싸운 어느 날 이치코는 집을 나가 작은 방을 얻은 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의욕은 없지만 딱히 결근하지도 않는다. 출퇴근 길에 복싱 도장 앞을 지나다가 조금씩 흥미를 느낀다. 이치코가 복싱을 시작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

요즘엔 다이어트 삼아 하는 사람도 많지만 '헝그리 복서' 같은 말의 이미지 때문인지, 인생의 저점에서 복싱으로 의욕을 되찾아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가 종종 있다. '백엔의 사랑'도 그런 범주다. 이치코는 복싱 시합을 구경 갔다가 경기 후 패자와 승자가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는 모습에 묘한 감흥을 느낀다. 이기겠다고 죽자 사자 싸운 뒤, 경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위로해 주는 풍경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걸까. 연애하고 일하고 복싱하는 이치코는 여전히 서툴지만, 그리고 32살이라면 어쩐지 좀 늦은 것 같지만, 이치코는 아랑곳 않고 늦은 배움을 이어간다. 경기에 한 번이라도 설 수 있을지, 처음 하는 연애가 잘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이것저것 계산하며 행동할 여유가 이치코에겐 없다. 이치코가 무언가를 의지대로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도 같다. '32살이면 늦었다'는 뉘앙스로 적어오긴 했지만, 평생 아무것도 의지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치코는 늦은 것도 아니다. 링 위에는 처절하고 장엄한 패배가 기다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말. 어찌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끝까지 재미있게 보게 되는 이야기다. 중국에선 이미 리메이크했고, 한국에서도 리메이크하려 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여배우에겐 분명 매력적인 역할이다. 안도 사쿠라는 일본영화에서 거의 보지 못한 유형의 배우다. '백엔의 사랑'에선 아주 조금 과장하는 듯한 순간도 있지만, 훗날 나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면 분명 훌륭한 배우다.

'백엔의 사랑'이 보편적인 영화라면,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특수한 영화다. 장르영화 문법을 차용한 미국 독립영화의 특성을 간직한 이 영화는, 아마 일반적인 영화팬보다는 영화를 굳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특정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을 작품으로 보인다. 레즈비언 커플, 근육질 여성, 1980년대, 스테로이드, 악독한 아버지, 폭력적인 형부와 수동적인 언니 등의 요소가 있다. 거친 여자들이 나쁜 남자들을 때리고 죽이고 함정에 빠트린다. 여자들도 딱히 선량한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그래서 매력적이다. 루(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일하는 체육관에 적힌 구호들(고통은 나약함이 육체를 떠나는 증거다) 같이 모든 것이 직접적이다. 처음엔 '델마와 루이스'의 21세기 버전인가, 하는 생각도 하다가 접었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여자 2명이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델마와 루이스'와는 크게 다른 영화다. '델마와 루이스'가 남성을 포함한 다수의 관객을 은근하게 설득하려는 영화라면,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창작자의 감정과 감수성을 거침없이 내지른 영화다. 설득될 사람은 되고, 말려면 말라. 엔딩에서 재키(케이티 오브라이언)가 헐크보다도 더 크게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 리얼리즘을 따지려면 당장 극장 문을 열고 나가 악플을 써라. 내가 영화를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창작자의 태도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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