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디 코베 '브루탈리스트'
브래디 코베의 '브루탈리스트'는 예술가 영화, 홀로코스트 영화, 디아스포라 영화다. 215분의 상영 시간은 이 런 요소를 모두 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러닝 타임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위의 어느 측면에서도 충분한 이야기를 뽑아낸 영화가 됐다.
건축가는 예술가인가. '브루탈리스트'는 그렇게 본다. 사실 건축가는 자본가인 건축주의 요구에 개인의 비전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측면에서, 온전히 창의적이고 주체적이라고 여겨지는 전통적 예술가 상에 부합하진 않는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결말을 바꾸는 소설가, 당대 시장에서 잘 팔리는 요소를 넣은 작품을 만드는 미술가를 완전히 창의적인 예술가라고 부를 순 없지 않은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헝가리 출신 건축가 라즐로 토스는 "정육면체를 묘사하기 위해 직접 만드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라즐로는 직접 형태를 구현하고 인간이 그 안에서 실제 거주한다는 측면에서 건축을 가장 실용적인 형태의 예술이라고 본다. '브루탈리스트'는 예술가 영화로서는 비교적 쉽고 명확한 구도를 택했다. 나쁜 자본가와 고집스럽고 괴팍하고 가난한 예술가의 대비. 자본가 밴 뷰런은 라즐로의 예술 세계를 동경하는 듯 하지만, 사실 자기가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명확히 한다. 라즐로는 아무리 자신의 급여를 줄이더라도, 심지어 급여를 0원으로 한다 해도 마거렛 리 밴 뷰런 센터를 만들 돈은 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고집을 굽히지 않으려는 라즐로를 두고, 밴 뷰런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굴복시키려 한다.
홀로코스트 영화와 디아스포라 영화의 요소는 자연스럽게 결합돼 있다. 수천 년간 유대인의 삶이 디아스포라이고, 디아스포라로 인한 비극의 정점이 홀로코스트니까. 홀로코스트를 벗어나 '자유'의 땅 미국에 오는 상황은 초반부 라즐로가 뉴욕에 도착하는 몇 분간의 시퀀스로 기막히게 표현됐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소식이 라디오 뉴스로 초반부에 전해지고, 이는 후반부 라즐로 부부와 그들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친척인 조카 조피아 사이의 갈등의 단초가 된다. 직업도 살 곳도 없이 무작정 조상들의 땅인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는 조피아의 말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디아스포라의 삶을 끝내고 싶다는 근본주의적인 열망이 느껴진다. 라즐로와 부인 에르제벳은 "미국에 사는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닌가"라고 되묻지만, 강렬한 민족주의의 열망 아래 이런 질문은 묻히고 만다.
요소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브루탈리스트'는 매우 전통적인 주제를 전하는 영화다. 예술가 영화로 한정해 보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가 되겠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같이 홀로코스트 이면의 잊혔던 요소를 부각하는 영화는 아니다. 수천 년 전 조상의 땅이었다는 이유로 최근까지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의 입장을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브루탈리스트'가 러닝타임이 무색하게 흥미로울 수 있었던 것은 연기, 음악, 각본, 촬영과 같은 매우 고전적인 영화의 기술적 요소들이 근사하고 세련되게 어울렸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이나 주제 때문에 어려운 영화처럼 느껴지지만, '브루탈리스트'는 사실 웰메이드한 상업영화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