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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살고 또 죽어도 계속 사랑하는 지극한 사랑

봉준호 '미키 17'

by myungworry

*스포일러 있음


'미키 17'을 봉준호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겠다. 국제적인 명성에 있어서는 '기생충'에 미치지 못하고, 흥행 성적 면에서는 '괴물'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하며, 반짝이는 창의성 면에서는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미키 17'을 못 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평균적인 할리우드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이 창의적이고 완성도 높다. 워너브러더스라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지원 혹은 방해를 등에 업고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많은 좋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미키 17'도 영화가 끝난 뒤 곱씹고 생각할 거리를 준다. 미키 17이 미키 18과 만나는 장면에서 어떤 관객은 예상을 못한 듯 작은 탄성은 질렀다. 영화는 이때부터 속도를 내며 달려간다. (같은 유전자에서 복제된 둘의 성격이 어찌 그리 다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둘이 다투다가 급기야 한쪽이 다른 쪽을 죽이려 하고, 역할을 나누자는 협상을 하고, 누가 진짜 미키 반스인지 헷갈려하는 대목에서부턴 내러티브의 속도뿐 아니라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급하게 깊어진다. 다만 봉준호는 이 질문을 끝까지 탐구하지는 않는다. '미키 17'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를 일단 던져둔 뒤, 나샤, 카이와의 삼각관계나 크리퍼와의 대결 등으로 슬쩍 넘어간다. 정체성 문제는 격렬한 주먹다짐 혹은 케네스 마샬 부부의 우스꽝스러운 지도자 놀이에 묻혀 잊힌다. 이 질문을 조금만 더 탐구해 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 점을 '미키 17'에서 나는 가장 아쉽게 생각한다.

'매운 맛' 미키 18과 '순한 맛' 미키 17을 모두 차지하려는 나샤의 의지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의 육욕을 강조하는 듯 느껴졌지만,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난 그 모든 미키를 사랑한다는 측면에선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사랑이라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마샬은 말투로 보나 본인이나 주변 인물들의 행동거지로 보나 누가 봐도 트럼프인데, 봉준호가 시침 떼고 아니라 한 것도 유머러스하다. 한국 관객은 윤석열, 김건희 부부를 떠올린다고도 하는데, 영화의 촬영 시점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감독의 에언적인 통찰이거나, 세계 어디서나 볼법한 한심한 지도자상의 재현일 수도 있겠다. 크리퍼와의 대립과 화해는 '옥자'의 주제, 감성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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