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오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아작 출판사에서 나온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선이다. 국내에 '체체파리 비법'과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로 출간됐던 작품들을 묶었다. 과거 읽은 많은 책들이 그러하듯, 여러 수록작을 마치 처음 접한 것처럼 읽었다. 이 정도로 기억이 안 날 수도 있나 싶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장르적 느낌이 강한 작가였는데, 다시 읽으니 꽤 관념적인 접근법을 취한 작품도 많았다. 어떤 작품은 '스타트렉'의 잘 만든 에피소드 같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21세기 한국의 여성 SF 작가가 썼을 법한 작품 같기도 했다. 1977년 발표된 소설('체체파리의 비법')에서 '페미사이드' 개념을 쓴 것은 놀랍고, 작품이 발표된 시대상을 고려하면 딱히 핵전쟁 같은 소재가 등장하지 않는데도 많은 작품이 여러 가지 이유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아인 박사의 마지막 비행'은 전염병, '어느 마지막 오후'는 괴수에 의한 파멸). 물질과 정신의 경계인지, 지구와 외계의 경계인지, 아무튼 모호한 경계를 넘어 추상적이고 싸이키델릭 한 저편을 그린 작품도 있다('비애곡'). '세속적 욕망'을 긍정하면서도 '영원한 삶의 부름'과 '물질성을 잃고 알 수 없는 목적으로 별들 사이를 흘러 다니는 거대한 의식의 흐름'으로 넘어가는 소년, 소녀를 그린 작품이다. 소년 소녀의 목적과 다른 결말이기에 새드 엔딩이겠지만, 평화로운 저승의 모습을 담대하게 그린다는 점에서는 해피 엔딩이기도 하겠다. 장르물로서 가장 빼어난 작품은 '꿈을 훔친 우리들'이다. 이 것이 위에서 언급한 '스타트렉' 에피소드 같다고 느낀 작품이다. 압제적인 인간의 지배에 맞서 싸우는 평화롭고 연약한 외계 종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좋은 장르물이 그러하듯, 익숙한 팬이라면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초심자라면 조금 충격을 받을 수 있는 반전도 좋다. 라이트 독자로서 SF를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바로 '꿈을 훔친 우리들'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