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도 당하는 휴머니즘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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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13계단>을 재미있게 읽었다. <제노사이드>는 <13계단>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다. 뒤늦게 책 표지의 다카노 가즈아키 이력을 살피니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 촬영, 편집 경험이 있다. <제노사이드>는 넷플릭스 8부작 시리즈로 제작할만한 스케일의 작품이다. 음험하고 사악한 강대국의 정치권력자, 그를 위해 일하면서도 양심을 가진 지식인과 관료들, 무지막지한 살인기계지만 저마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용병들, 학업에 큰 동기를 느끼지 못하고 가족과도 소원했으나 '생명을 살리고 싶다'는 강렬한 계기로 위험천만한 일에 뛰어드는 젊은 약학자, 그를 돕는 역시 선량한 이방인, 선한 듯 보이지만 배후가 의심되는 기자, 극심한 내전중인 아프리카에서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피그미족, 그들을 연구하기 위해 함께 거주하는 거부 출신의 인류학자, 주인공 주변에 나타나는 의문의 여성, 무엇보다 새로운 인류의 출현. 이런 요소들을 읽기 좋게 섞어 그럴듯한 내러티브를 만들었는데 재미없을 수가 없다. 구성 요소가 너무 많으면 혼란해질 수 있는데, 다카노는 솜씨가 좋다. 게다가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사이다' 요소까지 있다.


'제노사이드'라는 제목에서 암시되듯, 인류의 잔인함과 악행에 대한 혐오가 배경에 있지만 결국 그 모든 끔찍한 행위들을 잊게 만드는 극소수 선인의 존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대중적인 일본 영화, 소설에서 종종 마주하는 휴머니즘이라 봐도 좋겠다. 그런 휴머니즘을 애써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읽고 나면 '알면서 당했다' 싶지만, 알면서 자꾸 당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 우리가 그런 걸 좋아하게 만들어진 것도 같다. 솜씨 없는, '덮어 놓고 휴머니즘'은 금세 탄로 나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제노사이드>는 함정을 잘 피했다.


미국의 번스 대통령 묘사는 조지 W 부시를 연상케 한다. 부통령은 명백히 딕 체니나 럼즈펠드 같은 부시 시절의 정치인처럼 읽힌다. 다카노는 이 책의 집필 당시 부시를 최악의 미국 대통령이라고 봤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부시는 분명 '정치인'이었다. 미국이란 나라를 사업체처럼 주무르는 셀러브리티 비즈니스맨 트럼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지, 그를 소설에 넣는다면 어떻게 그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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