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는 맥거핀

요코야마 히데오 '64'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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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는 12년간 기자로 일하다 미스터리 작가로 데뷔했다. 2~3년이면 몰라도 12년이면 기자 생활의 쾌락과 고통과 보람과 환멸을 모두 알만한 시간이다. '64'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64란 쇼와 64년, 즉 1989년을 뜻한다. 이때 일어난 여아 유괴 및 살해 사건이 미제 사건으로 남은 14년 뒤가 배경이다. 당시엔 큰 사건이었지만 이어진 천황의 사망으로 여론의 관심은 사그라든다. 한때 형사였으나 지금은 홍보담당관으로 일하는 미카미 요시노부의 시선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미카미는 관계가 조금 소원하던 딸이 가출한 상태라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다. 공소시효가 1년 남은 시점, 경찰청장이 여론 환기용으로 지역을 찾아 64 사건 피해자의 명복을 빌려고 한다. 미카미는 홍보담당관으로서 청장의 방문 일정을 원활히 처리해야 하지만, 홍보실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관계자의 실명 공개 여부를 두고 기자단과 갈등을 겪고 있다. 경찰은 시대 상황에 맞게 익명을 주장하지만, 기자단은 실명 공개를 강력히 요구한다. 사소한 사건이기에 실명이 공개되든 공개되지 않든 기사 작성에는 큰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경찰과 기자단은 이를 두고 일종의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 보인다. 경찰 입장에서 서술되기에 막무가내로 무례하게 대드는 기자들이 밉상처럼 보이다가도, 갑작스럽게 비실명을 추구하는 배경에 경찰의 또 다른 속내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미카미도 마음으로부터 당당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게 된다.


경찰과 언론의 갈등이 한 축이라면, 형사부와 경무부의 갈등은 또 다른 한 축이다. 현장에서 범죄를 직접 담당하는 형사부와 이를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경무부는 서로를 무시하고 경원시한다. 여기에 지방과 도쿄의 갈등이 추가된다. 형사부는 경무부가 도쿄와 한패가 돼 인사 등에 있어 형사부에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의심한다.


이런 얼개로 진행되니 내가 이 글의 제목을 '범죄는 맥거핀'이라고 붙였다. 물론 종반부에서는 14년 전의 유괴 사건이 의외의 방식으로 실마리가 잡힌다. 심지어 꽤 기발하고 박진감 있다. 그러나 그건 종반부 이야기일 뿐, 그 이전까지는 경찰 대 언론, 형사부 대 경무부, 지방 대 중앙의 갈등 구도를 서술한다.


그러니 '64'는 추리 소설이라 할 수 있나. 놀랍게도 범죄를 추격하는 형사들의 분투 못지않게, 3중의 갈등 구도가 흥미진진하다. 이 갈등의 틈바구니에 끼어 분투하는 미카미의 헌신과 자부심도 잘 묘사돼 있다. 거대한 관료 조직 내에서 이래저래 나타날 수 있는 캐릭터들도 특징을 잘 잡아 그려냈다. 아마 현역의 직업인들이 본다면 좀 과장됐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무리가 없다.


일본의 창작자들은 거대 조직 내 갈등 묘사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창작자들은 조직 내 문제를 개인의 분투와 고통 차원에서 세밀하게 그린다면, 일본에선 조직 관리의 측면에 관심을 두는 작풍이 있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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