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열리고 있는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을 보다가 '자연의 섬세한 변화에 대한 감동(あはれ)'을 테마로 한 전시실에 오래 머물렀다. '감동'이라기보다는 '애수' 혹은 '슬픔'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지도 모른다. 주로 가을풀 같이 지금은 살아있지만 곧 죽을 생명체를 묘사한 작품을 이렇게 묶었다. '겐지 모노가타리' 40첩 '미노리' 중 한 대목을 묘사한 그림도 이 전시실에 있었다. 겐지가 자기 때문에 평생 속 썩은 병상의 무라사키를 찾은 장면이다. 찾아보니 무라사키는 곧 세상을 뜨고, 인생만사에 회의를 느낀 겐지는 출가한다고 한다.
이 전시실의 정서가 마음에 들어 내친김에 '겐지 모노가타리'를 구했다. 여러 가지 판본이 있는데, 세토우치 자쿠초가 현대일본어로 옮긴 판본을 번역한 한길사 번역본이 가장 읽기 쉬울 것 같아 골랐다. 세토우치 자쿠초는 젊은 시절 불륜으로 이혼한 뒤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과감한 성적 묘사로 논란을 일으켰으며 출가해 비구니가 됐고 이후에도 소설을 쓰다가 2021년 9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한다.
현대어 옮긴이부터 심상치 않은 작품이다. 1000년 전 일본 '소설'이 재미있을 리가 있을까, 약간의 의심을 품고 읽어나갔지만 의외로 술술 읽혀 놀랐다.
이 소설이 잘 읽히는 이유는 현대 대중문화의 용어를 빌린다면 '막장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겐지 이야기'는 천황의 아들이자 수려한 용모를 가진 겐지의 일생을 다룬다. 그중에서도 그의 정치 역정, 군사적 모험, 학문적 성취가 아니라 여성 편력이다. 그의 왕성한 연애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범죄'라 단정할 수 있는 행각도 있다. 겐지는 그 지위 때문에 '누가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고, 겐지 역시 그런 상황을 이용해 여성에게 접근한다. 겐지의 연애 대상은 지위고하를 막론하지 않는다. 상대의 결혼 여부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든 연애 방식이 매우 다채롭다. 겐지와 상대 여성의 반응도 그만큼 다양하다. 1000년이라는 시대 간극이 있을지언정, 인물의 내면이나 행동 양식에서 모든 캐릭터가 매우 생생히 살아있는 듯하다. 자연의 변화에 사랑의 슬픔, 기쁨, 초조함, 원망을 의탁해 표현하는 문구도 탁월하다. 인물의 내면 풍경이나 행동 방식의 표현법이 매우 은유적이고 우회적이어서 행간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두 사람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잦다. 어찌 보면 요즘 '밈화'되고 있는 '교토식 화법'의 정수이기도 하다.
일단 전 10권의 판본 중 2권까지 읽었다. 평생의 이상적 여성인 후지쓰보가 출가하고 겐지는 또 다른 성적 편력을 시험하다가 곤궁에 빠지고 현실 정치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는 대목까지다. 대략 겐지가 25세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