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랩 Nov 02. 2022

성공한 덕후가 된 건가

덕후가 승무원이 되면 생기는 일(feat. 도깨비)


(커버 사진 출처 ; 디스커버리)


나의 여러 가지 정체성 중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덕후'로서의 자아이다.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은 나의 대화 상대이자 좋은 친구였고,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란 내가 가장 오래 기댔던 양육자(?) 역시도 텔레비전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할머니 옆에서 보던 일일 드라마부터, 예능 프로그램, 음악 프로그램을 하루 종일 지치지 않고 보는 게 나의 유일한 취미였다.


할아버지가 매일 구독해서 보시던 신문을 열심히 넘겨 'TV 편성표'에 형광펜으로 오늘 볼 프로그램을 줄 쳐 놓는 것이 그 시절 나의 모닝 루틴이었고, 시간에 맞춰 채널을 돌려보는 게 나의 기쁨이었다.


그렇게 TV를 보며 자란 나는 상상하기도 엄청 좋아하는 '프로 상상러'였고, 늘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과 친해지는 상상, 사랑에 빠지는 상상, 어른이 되면 같이 친구가 되어 술을 한잔하는 상상, 우연히 마주치면 내가 얼마나 그 사람의 팬인지 열변을 토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신화랑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기'란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십 대 중반이 되자 조금 현실적인(?) 상상으로 변질되었다.

'방송국 PD랑 결혼해서 집들이에 샤이니 초대해서 밥해주기'

음, 아직 서른 전이니까 철들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대망의 서른이 되었다. (사실 좀 억울하다 왜 하필 그때) '당신의 소년에게 투표하세요'라는 슬로건으로 무려 101명의 소년들이 나에게로 다가왔고

서른이 되었으나 나의 꿈은 이제 '얼른 결혼해서 딸을 낳아 강다니엘 장모가 되기'가 되었다.


지금 나이 서른다섯, 이제야 철이 좀 든 걸까?

그런 허황된 꿈은 이제는 접었다. 하지만 아직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는 꿈이 있다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서비스하기’이다.



한일 노선, 패션위크 때의 파리나 밀라노 노선, 그리고 MAMA 시상식이 열릴 때의 홍콩.

이런 때 비행을 하게 되면 괜스레 두근거린다.

'혹시, 오늘 비행기에 연예인이 타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덕후들이 흔히 말하는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 탄다)'라는 말은 정말인지, 나는 늘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돌을 한 번도 서비스해보지 못했고,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의 배우들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일등석 담당의 날.

손님 성함 : 공지철.

그분이 나에게로 왔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성큼성큼 오는 포스부터가 남달랐던 그분.

너무 좋아하는 배우를 내가 직접 담당 승무원으로 서비스하는 것이 난생처음이었다.

늘 바라고 또 바라던 상황인데 막상 상상이 현실이 되니까 나도 모르게 뚝딱거렸다.

일등석은 다른 클래스에 비해 식사 서비스 코스가 더 세분화되어있고 길다.

그래서, 승객에게 메뉴 주문을 받을 때부터 각 코스별로 어느 것을 드실지, 와인이나 음료는 어떻게 곁들이실 건지 질문할 게 많다.


메뉴 주문이 끝나도 각 코스마다 설명이 꽤 길다.

특히나 샐러드, 치즈 코스의 경우 카트에 재료들을 싣고 가서 손님 앞에서 직접 보여드리고 원하시는 샐러드를 종류별로 앞에서 담아드리고 드레싱도 따로 주문받아 그 앞에서 세팅해서 제공한다.


나는 공지철 손님에게 가는 그 모든 순간에 빈속에 '스프레이형 구강 청결제'를 뿌려댔고, 그날 속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샐러드를 설명하고 담는 건 도저히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서 같이 일하는 후배님에게 부탁하고 나는 주문에 맞게 세팅을 하는 역할을 했는데,

떨리는 손 때문에 방울토마토를 짚지 못해서 앞에 승무원을 당황시켰다.



비행기에 연예인이 타면 그 큰 비행기에 승무원들끼리 속닥속닥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아, 같은 비행기를 탔는데 나는 가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다니..' 싶어 안타까울 때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서비스를 하니 맘 편하고 쉽게 연예인을 마주할 수 있어서 좋지만 이렇게 '최애' 연예인을 만나고 나니 너무 떨려서 잘 기억이 안 난다.



가끔, 아이돌들이 타면 승무원들이 '아이돌인가 봐'라고 짐작만 하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 답답하고 원통해하며 '하, 난 누군지 아는데, 나도 보고 싶은데!!' 할 때가 참 많았다.


그리고, 연예인이 탑승하고 또 서비스를 하게 되는 날의 텐션은 확실히 다르다.

뭔가 더 들뜨고 기분 좋게 묘한 흥분감이 있는 비행이 된다.


"내려서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하는 굴뚝같은 마음.

당장 기내에 와이파이가 생기면 좋겠다, 얼른 자랑하고 싶어 미치겠네!!! 하는 마음.


이렇게나 연예인을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그들과 가까워지는 꿈을 꾸며 자란 서른이 훌쩍 넘은 기혼자는 아직도 여전히 연예인의 탑승을 기다린다.


부디 한마디라도 말을 섞어보길 바라면서, 손을 덜덜 떨어도, 구강 스프레이 과다 섭취로 속이 쓰려도 괜찮으니 제발 내가 서비스하는 비행기에 타 달라고 바라면서!


크으, 그래도 나 제법 성공했나 보다.

간절한 바람을 가끔 이뤄낼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다니.

오늘도 별게 다 감사한 하루다.


신화 친구도, 샤이니를 초대할 사모님도, 강다니엘의 장모도 되진 못했지만

공유를 서비스하는 승무원이 되었으니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그래서 한국 가서 뭐 드실 거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