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면 애 버리고 간 줄. 공항에서 엉엉 운 사연.
태어나서부터 줄곧 함께하던 엄마가 내가 5살이 되던 1992년,
원래 다니던 회사의 '재채용' 공모를 보고 합격해서 입사하게 되었다.
다시 승무원이 된 것이다.
내 나이 다섯살. 그렇게 나는 승무원의 딸이 되었다.
늘 옆에있던 엄마가 눈 떠보면 이미 출근하고 없고,
일 년에 서너번 만난 게 전부인 할아버지 할머니 댁으로 옮겨져있는
도무지 적응하기 힘든 상황.
어려서부터 나는 너무 안 울어서 꼬집어도보고 때려도 봤다고 할만큼 눈물이 없었고 보채지도 않는 육아 난이도 1의 순한 아이였다고한다.
소리지르고 떼쓰는 일이 없고 울어도 조용히 눈물만 뚝뚝 떨구는 그런 아이.
눈물에는 절대량이 정해져있는지 아가때에 비축해둔 눈물을 다섯살 이후 엄마와 떨어진 시기에 다 쏟아냈다.
승무원의 딸로 산다는 것은, 워킹맘의 딸로 사는 것보다는 조금 더 힘든 것 같다.
왜냐하면 아빠에겐 있는 주말이, 다른 일하는 엄마에겐 있는 주말이 유독 우리 엄마에게만 없다.
그들에겐 있는 명절이, 휴가가 우리 엄마에게만 없다.
어린 나이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90년대 초반이었고 그때엔 일 하는 엄마들보다 집에 계신 엄마들이 훨씬 많았다.
친구들 집엔 매일 계신 엄마가 우리집엔 며칠씩 없을 때가 많았다.
아빠도 저녁에 겨우 몇 시간 볼 뿐이었다. 아빠도 늘 바빴으니까.
그래서 여름 휴가, 명절 때마다 나는 친척동생들과 고모, 고모부, 이모, 이모부들이랑 놀고 엄마없이 가족 모임에 끼는 경우가 참 많았다.
고모가 날 데리러와서 같이 가족모임을 간다던가, 이모랑 같이 할머니 집에 가거나 하는 식으로.
놀러가서 동생들이랑 신나게 놀 때는 잘 몰랐던 허전함이 저녁에 잠을 잘 때엔 크게 느껴졌다.
다들 제 엄마 품에서 잠을 자는데 나만 혼자 자거나 고모나 이모 옆에 끼어 자는 기분.
(나는 양가에서 모두 첫 손주라 친척 동생들 밖엔 없다.)
정말 솔직한 말로 아빠가 보고싶었던 적은 잘 없는 것 같고, 엄마가 너무 많이 그리웠다.
우리 엄마는 어디에 있는건지, 언제 오는 건지. 어릴 땐 그런 개념도 잘 없었고, 할아버지 집에 있다가 할아버지 차를 타면 "와 엄마 오나보다. 집에 가나보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에 가족끼리 지방 여행을 갔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엄마도 아빠도 있는 가족 여행!!(셋이 여행은 갔었지만 이렇게 다같이 가는 모임이나 여행엔 꼭 한 명씩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설악산이었던 것 같은데 산을 오를 때부터 한 손엔 엄마 손, 다른 한 손엔 아빠 손을 잡고 걷는 그 길이 하나도 안 힘들고 신이났다.
게다가 저만치 올라가면 케이블카도 탄다고하니 너무 흥분되고 신이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한창 어린 시절의 기억인데 아직도 생생하다.
중간쯤 올라가서 큰 불상 앞에서 사진도 찍고 케이블카를 알아보려고 하는 중에 엄마한테 급히 연락이 왔다.
회사였다.
결원이 생겼는지 급하게 엄마를 찾아서 엄마가 출근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멀리 지방까지 와있는 상황을 말했음에도 엄마가 가야하는 거라면 그 당시에 정말 급박했던 상황인 것 같긴하지만 나로서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엄마의 표정이 변하고 전화기를 찾아 오래 통화하는 순간부터 나도 어느 정도 예감했던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엄마는 없겠구나. 내가 기대한 오늘이 기대처럼 흘러가지 않겠구나.
엄마는 가까운 국내 공항으로 가야하는 상황이었고, 케이블카 타러 아빠랑 가라고 더 놀고 오라고 했지만 이제 케이블카는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 동안 참아왔던 모든 떼를 뭉치고 뭉쳐 그 날 다 발산해버리기로 했다.
도저히 이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막말로 , 나도 참을만큼 참았다. 이게 내가 얼마나 기대했던 날인데.
차라리 처음부터 안 갔더라면 이렇게 슬프고 억울하진 않았을텐데. 케이블카까지 함께 와 놓고 이렇게 가야한다고 하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온 몸을 떨면서 엉엉 울었다. 자지러지게 운다는 표현은 이럴때 쓰는 건가.
악을 쓰면서 울진 못했지만, 숨이 넘어가게 울었다. 너무 고통스럽고 슬펐다. 그 때가 여섯살? 일곱살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인생 최대의 슬픔이었나보다.
즐겁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랐던 산을 엉엉 울며 엄마를 잡아끌며 내려갔다.
등산객들이 다 쳐다보고 돌아봤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나도 이판사판이다. 엄마를 막아야했다. 꼭 같이 이 여행을 해야했다.
엄마가 가버린다는 공포가 극에 달했는지 울다가 딸꾹질이 시작됐고, 멈추지 않았다.
정말 숨이 넘어갈듯 울고 딸꾹질을 반복하니 엄마도 너무 걱정이 됐나보다.
"딸꾹질 멈추면 엄마 안 갈게. 그만 울어. 응?"
잠깐 나를 달래려고 한 엄마의 선의의 거짓말에 나는 모든 걸 걸었다.
숨을 참고 혀를 깨물며 눈물을 그치려했고 딸꾹질을 참으려했다.
숨을 막아도 넘어오는 딸꾹질이 너무 야속하고 그러면서도 공항으로 가고 있는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딸꾹질이 멎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공항에 도착한 후로도 나는 "엄마 가지마!! 여기 있어. 나랑 같이 있어" 하고 서럽게 울었다.
공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고 무슨 사연인지 너무 궁금했을테지.
그저 일 가는 엄마와 떼 피우는 딸인데, 거의 영화 한 편 수준의 모습으로 울었다.
엄마는 결국을 일을 갔고, 나는 그 뒤로 다시 여행을 갔었는지 아빠랑 집을 간 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온 에너지를 엄마의 출근을 막는 데 써서 탈진을 했는지도.
전에도 말했듯이 승무원인 나에겐 '계획'이란 있을 수 없다.
그 날의 엄마처럼 멀쩡히 영화를 보러가는 길에 '내일 새벽 보스턴 가셔야합니다.' 전화를 받은 게 몇 달 전이다.
전화를 받고 통보를 받은 이상 억울하고 화가나도 가야한다. 그게 내 일이니까.
나는 화가나고 황당해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먼 훗날의 내 아이는?
그 날 숨을 참고 딸꾹질을 멈추려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그냥 가도 가기 싫은 일을, 안 울던 내가 그렇게까지 울며 버티며 말렸을 때.. 얼마나 내려놓고 싶었을까.
그런 기억이 짙게 남아있어서인가.
신입 시절 회사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탈 때 주변에서 들리는 전화 통화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 적이 많다. (회사에서 브리핑을 하고 버스로 다같이 공항으로 이동한다)
"응. 미안해~ 할머니 말 잘듣고 울지 말고 있어~ 엄마가 두 밤 있다가 올게~ 알았지?"
"우리 00 잘 참을 수 있지요? 선생님 말 잘 듣고 동생이랑 잘 놀고 있어~ 엄마 금방 올게"
여기저기 그 짧은 이동시간에 아이를 다독이고 인사를 하는 그 순간. 승무원 엄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시절의 우리 엄마를 보고, 또 전화 너머의 나를 본다.
수많은 엄마인 승무원의 뒷모습과 무거운 출근길을 보며, 힘들었을 그 시절의 엄마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