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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랩 Dec 29. 2022

승무원의 꿈 이야기

꿈이라 쓰고 악몽이라 읽는다




시간의 여유가 많고 맘도 편안한 오늘 같은 날은 잠도 깊이 자고 꿈도 잘 꾸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날 비행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거나 시차가 뒤틀려있는 상황에 미래에 힘들 나를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할 때면 얕은 잠을 자거나 얼마 못 가 깨기 일쑤다.

차라리, 그 정도에서 끝나면 좋을 텐데 악몽을 꾼다. 지독히도 생생한 비행 꿈.

수많은 비행 꿈들을 3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첫 번째로

<비행에 늦는 꿈 버전>


- 주로 다음 날 일찍 깨야하는 상황에서 자주 꾸는 꿈이다. 알람을 맞춰두고도 잠이 안 와 정신이 말똥말똥하다가 내가 잠든 지도 모르고 어느새 잠든 날, 현실과 꿈이 잘 구분되지 않는 날 자주 꾼다.


“아 지금 자도 네 시간밖에 못 자. 얼른 자야 돼…. 얼른 자자 , 제발….”


“내일 깜깜한 새벽에 깨서 준비해서 가야 하는데, 엄마 아빠도 잘 텐데 내가 알람 못 들으면 어쩌지?”


“앞치마는 잘 챙겼었지?”


걱정과 잡념이 뒤섞여서 살짝 눈을 감았다가 , 결국은 못 자고  기어이 폰을 열고 시계를 보고, 또 그새 줄어든 수면시간을 계산하면서 속상해하고 그러다가 인스타그램에 “잠이 안 온다” “망했다. 눈뜨면 호텔이길…” 따위 아무 소용없는 글을 쓰다가 또 수면 시간을 까먹는다.


-비행에 늦는 꿈 버전은 케이스가 아주 다양한데, 신기한 것은 내 승무원 동료들도 각양각색의 비슷한 버전 꿈을 많이 꾼다는 것이다.


-게이트 앞에 와서 보니 사복을 입고 도착한 버전. 진짜 심장이 쿵 떨어지고 울며불며 휴대폰에 대고 엄마한테 전화를 하고 패닉에 빠진 채 벌떡 깬다. (엄마는 무슨 죄) 시계를 다시 보면 15분도 안 잤다. 그래도,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면 된다는 생각에 감사하게 된다.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하는데 죽어도 머리가 안 되는 꿈.

시간은 미친 듯이 흘러가고 내 팔을 부서질 듯이 아파오는데 쪽머리가 당최 완성이 안된다. 꼬리빗으로 잔머리를 이리 빗고 저리 빗고 스프레이를 챡챡 뿌려도 머리가 산발이다. 막 눈물을 뚝뚝 흘려가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머리를 빗는다. 어피 (appearance 유니폼을 입을 때에 준하는 용모) 지옥의 꿈.

(막상 나는 머리를 그냥 질끈 묶는 타입이라 머리 하는 데 5분 이상이 안 걸리는데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런 꿈을 꾼다.)


-인천공항의 전 게이트를 뺑뺑이 도는 꿈 버전.

게이트를 보고 열심히  그 게이트로 가면 목적지가 내 게이트가 아니라, 전광판을 찾아 다른 곳으로 걷고, 걷고 또 걸으며 거의 산티아고 순례길 걷듯이 지옥의 게이트 뺑뺑이를 돌다가 떠나는 비행기를 보고 좌절하는 꿈.




<내일의 듀티를 미리 해내는 시간 여행자 꿈.>


- 비행 전 날에는 내가 내일 어느 클래스 (일등석, 비즈니스, 일반석)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가 결정된다. 내가 무슨 일을 할지 확인하고 그에 맞게 준비를 한 뒤 출근하게 되는 거다. 문제는, 확인한 대로 꿈에서 일을 한 번 더 하는 꿈을 꾼다는 거다. 이미지 트레이닝이 과하게 실천된 케이스다.


- 현실보다도 더 현실 같은 곳에서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일을 하는 꿈. 너무 디테일하고 현실 같아서 꿈에서 깬 뒤에 또 바로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 방송 듀티를 자주 맡아서 하는데, 방송 듀티에 관한 꿈도 자주 꾼다.

방송문을 노트처럼 가지고 다닐 때에는 내가 방송하는 타이밍에 방송을 켜고 해당 방송문을 뒤지는데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그 부분이 안 나오는 꿈을 꾼다. 앞으로 넘겨도 , 뒤로 넘겨도  해당 부분은 보이질 않고 동료 승무원들이 왜 빨리 방송을 하지 않느냐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그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는 꿈이다.


- 최근에 이 꿈은 업그레이드되었는데, 휴대폰에 방송문 파일을 넣어서 보며 방송하게 된 후로는 손으로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해당 방송문이 안 나와서 엄지손가락이 엄청 바쁘게 스크롤을 내리는 꿈을 꾼다. 꿈도 현실에 맞게 진화되어 , 이게 꿈인지 인지를 못하고 꿈속에서 난 늘 너무 초조하고 불안해한다.


 <다양하게 변주된 컬래버레이션 꿈>


- 나는 원래도 꿈을 총천연색으로 생생히 꾸고 깬 후에도 오래 기억에 남아서 가끔은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외국인 손님이 손짓발짓을 해가며 힘들게 나에게 한국 음식을 주문하는 데 “므을회에” 라고 말했던 것. 물회를 주문하는 손님이 너무 황당해서 꿈에서 깨서도 그 꿈에 대한 내용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적이 있는데, 이것은 예지몽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된다…


-나는 경기도민이라 택시보다 빨리 달리는 폭주 버스를 타고 험하게 서울을 다녔는데, 그 사람 많은 버스 뒷문에 쭈그려 앉아서 차일드 밀

(어린이들을 위한 식사로, 사전에 신청하면 제공되는 스페셜 밀의 일종이다)에 들어가는 브라우니와 간식을 세팅하는 꿈을 꾸었다.

흔들리는 버스나 흔들리는 비행기 뭐 다를 바는 없지만 쭈그려 앉아 버스 뒷문에서 조용히 플라스틱 박스 안에 마가레트와 브라우니를 넣는 힘겨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은 너무 황당하고 생생해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밖에도 식사 서비스 카트가 저 멀리서부터 나에게 돌진하는 꿈, 비행기가 추락하는 꿈, 너무 많은 악몽을 지난 10년간 꾸어왔다.


“아니 나는 아이 낳고 일도 쉬는 데 몸 힘든 날엔 비행 꿈꾼다니까”라고 말하는 친구한테는 엄마 이야기를 해준다.

“엄마는 일 관둔 지가 30년이 넘었는데도 가끔 비행 꿈꾼대…”

그럼 다들 이 꿈을 평생 안고 가야 하나보다 하고 끄덕인다.


글을 쓰면서 모아보니 일을 하는 순간뿐 아니라 준비하면서, 가기 전에도 얼마나 비행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안고 살고 있었는지 , “지각” “미스 플라이트”(비행을 가지 못한 경우를 나타내는 말)가 얼마나 큰 공포였는지(여전히 그렇지만) 느끼게 된다.


엄마 말대로 평생 꿔야 할 꿈이라면 어쩔 수야 없지만, 이제 어느 정도 맘의 부담을 덜고 좀 푹 자고 출근하는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내일은 벌써 스케줄이 나오네.

10년이 넘게 스케줄이 나올 때마다 기대하고 늘 실망하는 것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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