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군대라 불리우는 곳에서 얻은 트라우마
(사진 : 지구 오락실 , 고깔게임)
박상영 작가의 < 믿음에 대하여>라는 책 중 “ 요즘 애들”이라는 챕터를 읽다가 신입 시절, 햇병아리 승무원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소리 지르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게 무엇인지 ,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이해하지도 받아들일 겨를도 없이 일단 머리부터 조아리고 “죄송합니다”를 최대한 반복해야 했던 때.
나는 도대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는 없던 그때.
오늘은 책을 통해 떠올랐던 그 시절 너무 가여운 나의 모습 몇 개를 꺼내보려 한다.
내가 3년 차쯤 되었을 때의 팀에는 나의 존재 자체를 깎아내리고 내 행동 모든 것을 지적하는 상사가 있었다. 그게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두를 향해있었으니 명백히 그건 그 상사의 업무 방식이 문제였던 것인데, 그즈음에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200%로 해석해서 받아들였다.
“너는 생각이 있니? 머리는 어디다 쓰라고 달고 다니는 거야?”
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그걸 그대로 흡수하고 괴로워했다. 그러게, 나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앤가 봐…라고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일을 가기 전부터 공포에 떨고 일을 하는 순간순간에도 손님보다는 그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분투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예능인데 “신서유기” “지구오락실”에 등장하는 고깔 쓰고 물건 찾기처럼.
난 정말 그 쪼그마한 구멍으로 그의 반응만을 살피며 일했던 것 같다.
그러니 자연히 시야가 더더더 좁아지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혼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 생존하기 위해 1년을 살았던 것 같다.
나중에는 그 공포가 극에 달해서 그가 눈앞에서 막 소리를 지르는데 , 순간적으로 이명이 와서 “삐——“ 하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앞에선 하얀 그의 얼굴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 모양만 보였다.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당황하고 얼른 그가 뭐라고 혼내는지 들어야 하는데 하는 맘뿐이었다.
“삐———“ 하는 소리가 멈추었을 때
“………거야?!!! 그래?”
라는 부분이 들렸고 앞에 내용을 정말 이명 때문에 하나도 듣지 못한 나는 그저 냅다
“네. 죄송합니다.”라고 얼른 대답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말 슬프게도 추측건대 “내가 우스운 거야? 내가 만만하니?” 정도의 내용이었는지
그는 안 그래도 희번덕 거리는 눈을 더 광이 나게 부라리면서
“네에?!!!!! 지금 너 네라고 했니?!!!”
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난 아직도 그 순간의 나를 cctv로 제삼자가 되어 관찰하는 것처럼 기억하는데
그 순간 나는 정말 멍청하고 바보가 된 것처럼
“아니요. 아니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벌벌 떨며 말했다.
내 나이가 27, 28 쯤이었을 텐데.
뭐라고 했는지 듣지도 못한 말에 대해서 그렇게 네, 아니 오를 우왕좌왕 방황해가며 그저 죄송하다고 조아렸다.
학창 시절에도 어디서 그렇게 큰 사과를 해본 적이 없고 살면서 큰 잘못을 해본 적도 없던 나는 그 일 년 동안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잘못하고 죄송했던 것 같다.
그냥 밥먹듯이 숨 쉬듯이 죄송합니다가 입에 배었다.
지나가던 선배가 바빠서 내 발을 밟아도 “어! 죄송합니다”
내 발이 거기에 있어서 당신의 통행을 방해했군요. 제 발은 아프지만 당신이 걷다가 놀라셨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거의 이 수준으로 마인드 세팅이 되었었다.
선배 있잖아요. 저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인간 취급을 받고 싶었어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름이나 알리고 싶어 하는 요즘 애들이 아니라, 방사능을 맞고 조증에 걸린 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요
-박상영 <믿음에 대하여>
그보다 더 신입일 때는 정말 내 몫을 해내기도 참 버거웠고, 그 시절에는 유독 일도 바쁘고 나와 같이 들어온 신입승무원이 참 많았던 때였다.
그렇게, 비행기에 타서 유니폼은 입고 있지만 “웃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신입들을 향해 선배들이 하는 말이 “기물”이었다.
비행기에 실리는 서비스 도구들이나 용품들을 다 통틀어 “기물”이라고 말하는데, 그 기물처럼 그냥 비행기에 타있다는 의미였다.
사람 아니고 기물 취급받는 것도 그래 그러려니.. 익숙해질 때쯤 , 진짜 딱 1년 차이나는 지금 생각하면 참 별로 차이 안나는 선배였는데 그 선배가 신입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었다.
“기물은 어디에 쓸 데라도 있지. 너네는 커튼이야. 정말 가만히 달려만 있잖아. 안 그래?”
아오……
어쩜 저렇게 맘을 후벼 파는 말을 잘도 주워왔을까 싶다.
그런 말들은 어디서 구전되어 오는 건지 돈을 주고 배워오는 건지.
잠시 잊고 있던 그 힘든 순간들,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요즘 애들”을 읽으면서 안개처럼 다 나에게로 왔다.
요즘에도 저런 식으로 후배를 다스리는(?) 선배가 있으려나,
글쎄 잘 모르겠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신입일 때만 해도 이런 식으로 숨 쉬기 버겁게 몰아치는 선배들이 참 많았다.
그냥 다독이며 가르쳐도 충분히 잘 따라올 텐데…
박상영 작가가 북토크에서 한 말을 빌리자면
“내가 내 자리에서 내 역할을 잘 못할 때, 오히려 후배를 그런 식으로 괴롭히는 방법으로 내 자리를 지키려는 것 같다” 는 이야기. 그 선배들은 그렇게 본인 자리를 지키려는 거였을까.
나는 지금 딱 팀에서 중간 위치 정도에 있다.
내가 너무 괴로운 신입 시절을 보내서 인가, 나는 되도록 싫은 소리를 안 하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꼭 필요한 때에 해야만 하는 피드백 앞에서도 주저하며 영 물렁거리는 선배일 때가 있다.
내가 여기서 제대로 피드백하지 않으면 일이 커질 수도 있고, 나중엔 내가 수습을 하지 못해서 감정적으로 후배를 대할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
이제는 내 위치에서 , 나를 괴롭히던 그들과 다르게 후배를 대하는 법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때가 되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으로 맘이 무겁고 머리가 아프다.
나는 아직도 가끔 내가 잘하던 일 앞에서도 쉽게 당황하고 멍-해질 때가 있다.
이제는 그렇게 혼날 일이 없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때처럼 소위 “엄청 깨질까 봐” 맘이 진정이 안 되는 때가 있다.
어떤 기억과 경험은 이토록 한 사람을 꽤 오래 지배하고 벗어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나는 부디 그냥 스쳐 지나간 일하는 동료, 혹은 따뜻한 선배이자 동료로 남고 싶다.
이렇게 오래 누군가에 맘에 비수로 남아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
다짐한다.
적어도 나는 동료를 감정적으로 대하진 말아야지.
도망칠 수 없는 비행기 안에서 10시간도 넘게
꽁꽁 묶여있는 그 외로운 공간에서
티도 못 내고 웃으면서 일해야 하는 동료에게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