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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랩 Feb 02. 2023

엄마 비행을 따라갔던 시드니에 가다!

추억으로 연결된 엄마와 나의 시드니




설날 당일, 시드니에 갔다.

연휴 내 역대급 강추위가 예고된다는 뉴스를 듣고, 10시간이 걸려 도착한 시드니는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시드니가 가장 아름답고 예쁜 1월에 이곳에 온 건 정말 행운이다.

 

외출이 두려울 만큼 춥거나 조금 걸을만하면 뿌연 미세먼지와 함께 해야 했던 겨울을 벗어나서인지, 거칠 것이 없이 드넓게 펼쳐진 파란 하늘과 빛을 받아 더 반짝이는 초록의 크고 무성한 나무들이 힘든 비행의 고단함을 녹여주었다.

그래서, 나갔다. 무작정.


코로나 이전 언제 왔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 4년 만의 시드니 었기도 하고 호텔 안에만 있을 수 없을 만큼 날씨가 좋았다.


코로나 동안에는 바깥 외출도 쉽지 않고, 갈 수 있는 취항지도 제한적이어서 예전에 누리던 기쁨보다는 그저 출퇴근하는 기분으로 왔다 갔다 하는 비행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아, 내가 이래서 내 일이 힘들다면서도 버티고, 또 설레했었지”라는 감각을 느낀 하루였다.


초록으로 가득한 넓은 정원을 걷다 보니 저 멀리 쪽빛으로 넘실대는 부둣가가 보였고, 신이 나서 달려가 바다를 따라 걷다 보니 “오페라 하우스”가 나타났다.

나 혼자도 충분히 행복한 이 순간이었지만, 이 기쁨을 꼭 나누고 싶어 남편과 부모님한테 사진을 보냈다.


“여기는 날씨가 참 좋아.”



체력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어 걱정이 많을 내 가족들에게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보냈다.

행복이 가득 담긴 얼굴로 찍어 보낸 셀카 뒤로 하버브리지를 발견했는지 엄마가 답장을 보내왔다.


“하버 브리지다! 기억나? 엄마아빠랑 갔었던 덴데!”



엄마는 급하게 앨범을 뒤졌는지 한참 만에 내가 네 살 무렵? 엄마의 비행을 따라갔던 시드니 여행의 사진을 보내왔다. 퀭하니 신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꼬마와 신이 난 젊은 엄마 아빠의 모습 뒤로 내 눈앞에 보이는 하버 브리지가 있었다.


삼십 년도 더 전의 일이라 모든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내 기억에도 그 여행의 부분 부분이 남아있다.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의 비행’에 따라간 일.



1992년. 다시 재입사를 한 뒤 엄마는 주로 국내선 비행을 다니고 달에 한 번 정도 국제선 비행을 가는 승무원이었다.

그때만 해도 운항 편수가 많지 않아 꽤 오랜 체류기간이 있어서 엄마의 비행을 따라 아빠와 시드니를 갔었다.


나를 케어해 줄 엄마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빠랑만 비행기를 탔고 식사 후 누워서 코를 골며 자던 아빠가 확실히 기억난다.

단편적인 기억 속에 또렷한 기억이니, 낯선 환경에서 의지할 유일한 아빠가 너무 잘 자서 꽤나 야속했나 보다.


그 시절엔 개인용 모니터도 없고, 일정 시간에 상영하던 영화도 어떻게 보는지도 모를뿐더러 만화가 아니니 이해도 안 되었을 테고…

낯선 곳에 엄마 아빠 없이 (아빠는 있었지만 없었다.) 혼자 장시간 비행을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무원 언니 중 하나가 그런 내가 딱했는지 그 당시 2층에서 근무하던 엄마에게 데려가 주었다.

사실 이 기억도 계단을 조심조심 올랐던 기억과 유니폼 입은 엄마가 안아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기억 조작인지, 편집된 기억인지 확실치는 않다.


비행기에서의 기억은 그게 전부이고, 입국 심사를 받으러 줄을 서다가 공항에서 토를 해서 아빠가 엄청 진땀을 흘렸다는 전해 들은 기억이 있는 그날.

(아빠에겐 이 사건이 가장 힘들게 각인됐는지 그때 본인이 얼마나 당황했는지에 대해 주로 기억하고 설명한다.)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나는 주로 뚱했고, (그 당시 계절을 거슬러 이런 호사스러운 해외여행을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으므로.)

‘캥거루’ ‘장난감 피규어 된 마을’ ‘파도가 치는 유명 명소에서 셋이 사진을 찍다가 파도가 덮쳤던 기억’(이 마저도 사진을 하도 봐서 그 기억이 내 기억이라 착각하는 지도..) 등 퍼즐 조각 같은 기억만 드문 드문 남아 있다.



이렇게나 기억은 흐려지고 옅어졌지만,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날씨와 경이로운 공간 속에서 흐린 기억을 붙잡고 엄마와 실시간으로 추억을 소환해 냈다.


삼십 년 전,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엄마와 아빠는 먼 훗날 이런 식으로 그날이 소환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그저 여기가 어디인지, 이건 뭔 지, 잘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꼬꼬마에게 좋은 거, 맛있는 거, 예쁜 경험을 선물하고 싶은 그 열정 하나로 나를 끌고 다녔을 것이다.

그 경험으로 난 더 멋지게 성장한 것 인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 까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행복한 순간에 엄마 아빠에게 이 풍경을 보내면서 나는 이해했다.



‘엄마도 아빠도 이런 맘이었겠구나. 이 순간을 같이 하고 싶었던 거구나. 나에게 이런 선물을 주고 싶었구나.’



엄마가 비행을 하던 시절엔 엄마가 국제 전화 카드로 전화를 하지 않는 이상, 4박 5일이면 5일 내내 엄마와는 생이별의 상태였다.

엄마가 어딜 다녀왔는지 말해주어도 난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 곳인지, 무슨 계절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필름이 다 차서 인화를 맡길 수 있을 즈음이 되면, 그제야 현상된 사진을 보고 ‘몇 달 전에 엄마는 여길 다녀왔구나’ 하며 시간차로 엄마의 순간들을 엿볼 수 있었다.

심지어 사진을 봐도 재미도 없었고 사진 속에 엄마를 찾아내는 게 전부였다.

(그 시절 나에겐 엄마가 전부였으니까. 많은 사진 안에 숨은 엄마 찾기가 ‘숨은 그림 찾기’보다 재밌던 때이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꽤나 실시간으로 내 행복을 내 안부를 전할 수 있다.


“여긴 밤이에요. 이제야 깼어요. 내일은 호텔 근처에 나가서 산책이나 해보려고요.”


이 정도면 양반이다.


“도착”


3일 뒤


“한국 도착”


일 때가 더 많다.



세상은 좋아져서 저 멀리 부모님과 실시간으로 모든 걸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호텔에서는 무료 와이파이가 빵빵 터지고,

휴대용 데이터를 들고 다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째 난 그 시절 엄마보다 더 연락을 못하고 있는 못난 딸이다.

호텔에 누워서는 휴대폰 보느라 바빠서, 밖에 나가서는 구경하느라 바빠서, 쉴 때는 자느라 바빠서…

사실 밥 잘 먹었다. 푹 잘 쉬고 있다. 이 정도의 안부여도 충분한데, 그 짧은 한 마디를 왜 그렇게 전하기가 힘든지.

(인스타 스토리는 실시간으로 잘만 올리면서 말이다.)


그 시절 우리 엄마는 너무 연락하고 싶고 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서 애가 탔을 텐데….

늘 다짐뿐이지만 연락 자주 해야지 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된다.


낡은 사진을 나눠보며, 또 너무 멋진 풍경을 공유하며 그 시절의 기억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

이제 여행도 자유로워지고 아빠도 퇴직 후라 시간이 많아졌으니 앞으론 내가 두 분을 모시고 오랜만에 또 좋은 곳에 함께 가봐야지 하는 다짐도 하게 된다.

여러모로, 화창하고 멋진 날씨의 시드니에게 감사한 하루였다.



일터에 나를 데려가 준 엄마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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