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ory my color
2020년 초 갑자기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쉼 없이 10년을 객실 승무원으로만 살아온 나에게 평생 올 일 없을 것 같은 긴 휴식이 주어졌다.
쉴 수만 있다면 나는 무얼 하고 싶었더라?
여행도 가고 싶고 가만히 뒹굴 뒹굴 알람 없이 푹 쉬고만 싶기도 하고 ,
일할 때는 좀체 허락되지 않는 염색 머리도 해보고 싶고, 쉴 계획이 전혀 없던 그때엔 뭐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급 휴직을 신청받을 때 앞으로 이 사태가 얼마나 길어질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신청을 했다.
“무급이라도 쉬게 해주는 게 어디야. 요 몇 달 잠깐 못 나가는 걸로도 이제 여름 되면 여행에 목마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리겠어. 그렇게 바빠지기 전에 쉬게 해 줄 때 쉬어야지.”
하지만 꼭 하고 싶던 여행도 모두가 모이기를 꺼려해서, 아니 바깥을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하지 못하고 이제 이 휴식이 영영 이어질 것 같은 불안으로 바뀌어갈 때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남들은 어떻게 일을 할까?
비행기에 타고 내리며 말 그대로 쏜살같은 시간을 보내오던 내가 처음으로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그래도 비행은 내리면 끝이잖아. 난 맨날 야근해야 하고 집에서도 연락 오면 받아야 하고…”
하는 푸념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딱 비행기 안에서만 집중하면 그 뒤로는 발 뻗고 쉴 수 있는 내 일이 나아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하늘 길이 막히고 나니까 나는 친구들처럼 재택근무를 할 수 없었다.
우리 집에 손님을 모셔다가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고 잠시 쉬게 눕혀드린 뒤 원하는 곳으로 뿅! 보내드릴 능력이 내겐 없었다.
비행기를 타야, 비행기가 떠야 내가 일을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무력감이 몰려오고, 불안이 커졌다.
언제까지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또 이런 팬데믹이 오면 나는 다시 휴직을 해야 하는 건가?
이런 고민 속에 여러 유튜브를 찾아보고 책을 보기 시작했다.
남들은 어떻게 일하며 살지? 재택근무는 어떻게 하는 거지?
하는 궁금증으로.
<퇴사는 여행>이라는 책과 <요즘 것들의 사생활>이라는 채널들을 보며 2030들이 프리워커로 일하는 모습,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리고, 동경하게 됐다.
와 멋지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내 창작물, 내 일을 만들어가고 그걸로 돈을 버는 사람들.
어떤 위기가 와도 ‘나’로서 나를 끌어갈 수 있는 사람들.
회사 눈치, 동료 눈치, 손님 눈치를 보며 내 색깔을 지워가며 살아온 10년의 생활과 비교되어서일까? 내 일을 말하고 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이나 보였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구나.
집에서 도면을 보고 회사 사람들이랑 채팅을 하고 통화를 하며 일을 해내는 남편도 신기했다.
다른 일을 재택근무를 통해 처음 구경할 수 있었다. 사무실 업무라는 건 나에게 그냥 드라마에서 보거나 친구들한테 이야기로만 들었지만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었는데, 남편이 일 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멋져 보였다.
나는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봐야 하는 학습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 말고는 컴퓨터로 할 줄 알는 일이 없었으니까.
한 동안은 갈피를 못 잡고 이것저것 다 따라 해봤다.
뉴스레터를 읽고, 경제 공부도 해보고, 센스 있는 브랜드 마케터들의 마케팅 책들을 읽어보고 워크숍에 참여도 해보고, 소규모 줌 미팅에도 참여해 보고.
한 일 년을 그렇게 방향 없이 미어캣처럼 좋아 보이는 모습을 따라 휙휙 쳐다보고, 몇 걸음 따라가도 보고 했다.
나는 마케터도 디렉터도 아닌데 자꾸 그들이 멋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닮으려 했고, 그러다 보니 나는 작아지고 부족한 사람이 되어갔다.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가 글쓰기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와 자기 계발 유튜버들이 글쓰기를 강조했고, 나도 일기를 끄적이거나 인스타에 소소한 일상을 글로 공유하는 걸 좋아했으니, 부담 없이 참여해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내 이야기를 하면 되었고, 내 이야기가 내 색깔이 되어 빛날 수 있었다.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고유함’이 있었기에 빛날 수 있었다. 마치 그들처럼.
결국 내가 그들이 부러웠던 이유는 ‘나’로서 낼 수 있는 색을 밖으로 표출하고 드러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조직에서 회사에 색에 맞게, 회사가 원하는 정신에 맞게 행동해 왔기 때문에.
‘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도 부족했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로 살아왔던지도..
그래서 회사가 , 직업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 불안했던 것 같다.
때문에 더 써내고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맘을 정리하고 나니 모든 게 편해졌다.
그토록 불만 가득했고 불안해하던 직업은 나를 나타내는 큰 글감이 되어주었고, 나는 직업인 이외에도 글을 쓰는 자아를 가질 수 있게 됐다.
글을 쓰고 난 뒤로는 모든 게 좋아졌다.
늘 비슷비슷하고 재미없다고 느꼈던 일터에서의 일들이 글감으로 기억되기도 했고, 더군다나 글은 어디에서도 쓸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디지털 노매드’가 가능했다. 내 ‘직업’으로 인해서 말이다.
남들은 한 달 살기나 출장, 여행 중에 하는 ‘디지털 노매드’를 나는 돈을 벌러 가서 취미 삼아 할 수 있다는 게 짜릿했다.
아이패드랑 키보드를 가지고 비행을 가서 새로운 공간에서 글을 쓰고, 해외의 카페에 가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대단한 글이 나오지 않아도 괜히 신난다.
내가 너무나도 동경했던 그 누군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글을 쓰고 나서 나는 내가 10대, 20대 때 동경했던 승무원 일과 30대가 되어 동경하게 된 글을 쓰고 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모두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코로나가, 덜컥 생겨버린 휴식이 나에게 준 새로운 정체성이다.
<날으는 글구름 연구소>
구름처럼 피어나는 매일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로 했다.
필명 <날랩> 날으는의 ‘날’ 글구름 연구소의 ‘랩’을 붙여서 완성했다.
새로운 정체성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글 구름들을 많이 수집해 가야지 다짐해 본다.
그러려면 일하는 정체성도 글 쓰는 정체성도 놓지 말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