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추위에 몸서리가 처질 때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었다. 겨울에 따뜻한 방에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느낌은 여름에 에어컨 켜고 이불 덮은 느낌과 비슷하다. 기분 좋은 느낌이다. 이런 이율배반적 느낌을 좋아하는 DNA는 우리 선조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냉면이 원래 겨울음식이었던 것을 보면. 겨울에 살얼음 동동 띄운 동치미에 메밀면을 말아먹던 게 냉면의 시작이었다. 냉장고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퍼지기 전까지 차가운 동치미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으니까.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뜨뜻한 아랫목에서 먹는 냉면은 정말 별미였을 것이다.
커피를 사러 가는 짧은 길에 익숙했던. 하지만 몇 년간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문득 들렸다. 사장님이었다. 잘 살고 있구나. 가장 최근 연락이 아프고 힘들다는 문자였는데. 변명으로 치장된 문자였는데. 잘 살고 있었구나.
사장님을 처음 만났던 건 몇 년 전 겨울이었다. 그 해 여름 함께 살아온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덤덤하게 슬펐다. 이것도 경험이라고 이십몇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많이 슬펐다. 할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공허함이 힘들었다. 그 공허함이 체화되는 내가 야속해질 때쯤 나는 덤덤해졌다. 할머니의 빈자리가 무심할 정도로 시간은 흘러 겨울이 되었고 나는 취업을 했다. 근무강도는 높았지만 원하던 업계에 취업을 해 기뻤다. 취업에 대한 자축의 의미로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고 싶어 동네 바를 갔다. 어두운 조명에 바 테이블을 밝히는 캔들과 생전 처음 마셔 보는 칵테일은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종종 들리면서 매니저가 중학교 동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창은 나에게 사장님을 소개해줬다.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첫인상은 동그란 느낌이었다. 키는 150 초반이고 체형은 전체적으로 동그랬다. 사실 사장님과의 첫인사는 시큰둥하게 지나갔다. 내 앞에 바텐더와의 대화가 재밌어서 그냥저냥 인사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몰랐다. 내가 바텐더와 나누는 대화에 숨어있던 약간의 호감이 사장님에게 들켰다는 걸.
현재 사장님과의 관계는 채권자(나)와 채무자(사장님)로 정의할 수 있다. 한때 관계를 유지시켰던 일방향의 유대감이 지금은 법으로 변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앞으로의 삶에서 서로에게 무언가를 말할 여지는 없지만 나에게 남겨준 이제는 흐릿한 마음의 상처와 버릇 몇 가지는 있다. 나는 이제 주말에 한 주를 돌아본다. 한 주간 충실하게 살았는지 반성할 점은 없는지를 생각하며 다음 주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한다. 가계부도 정리한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아야 내 안에 있는 불안감이 다시 줄어든다. 어찌 보면 나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잃지 않으려는 강박적인 발버둥이다. 가끔 강박이 심해질 때면 마음을 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