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 관련 서류를 전송하고 나면 나는 다시 살림하는 엄마로 돌아간다. 분주하게 수업을 준비하고 글을 고치며 피드백을 고민하던 날들과는 다른 리듬으로 나만의 시간을 보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이가 등교하고 나면 집 안엔 고요가 내려앉는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쉼’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나의 비시즌’이라 부른다. 커피를 내리고 책을 읽으며 다음 수업을 위한 내용을 천천히 구상하는 시간. 이 조용한 하루들이야말로 다음 수업을 단단하게 지탱해 줄 토대가 되어준다는 걸 나는 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 년에 딱 두 번 찾아오는 이 시기에 나는 내 방식대로 마음껏 논다. 우선 내가 사는 지역의 서점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장르별 신간을 살펴보고 비시즌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을 책을 고른다. 평소엔 엄두가 나지 않던 두꺼운 장편 소설도 이 시기엔 부담 없이 펼쳐 본다. 서점에서 어렸을 때 읽다 만 고전 소설이 눈에 들어오면 심호흡을 한 후 페이지를 넘겨본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한 페이지씩 넘기다 보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몇백 년 전의 삶과, 밀도 높은 문장에 흠뻑 젖어 집에 돌아가면 해야 할 청소와 빨래를 잊곤 한다.
책으로 마음을 채웠다면 이제는 문화생활로 감정을 끌어올린다. 오전에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며 그동안 부대꼈던 감정을 털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감정을 채워 넣는다. 대게는 기쁨, 희망, 벅참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이다. 이것은 엄마로 살아갈 몇 달을 대비에 마음 곳간에 좋은 감정을 비축하는 나만이 방법이다. 그리고 강의료 일부는 아껴두었다가 꼭 보고 싶었던 공연과 전시회를 보러 서울로 향한다. 대학 시절에 과제 때문에 자주 찾던 극장이 이제는 삶의 활력소가 되었으니, 이런 활력을 얻기 위해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충분히 놀았다 싶으면 이제 공부 모드로 전환한다. 다음 시즌 수업을 위한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참고할 만한 작가 인터뷰 영상과 출판계에서 요즘 주목하는 작가와 책에 대한 영상도 찾아본다. 도서관에서는 첨삭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아 읽고, 그동안 봤던 영화와 드라마를 주제별로 다시 정리한다. 비시즌에 하는 이런 공부는 정해진 커리큘럼에서 새로운 주제로 확장되는 자양분이 된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시간은 내 이야기를 쓰는 순간이다. 수강생들의 글을 첨삭하는 일도 보람 있지만, 내 문장을 쓰는 일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한때는 '나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인가?' 의심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첫 문장을 쓰다 보면 다음 문장은 저절로 써진다는 것을 손의 감각이 알려준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A4 한 장 분량의 글이 나오고, 내가 먼저 쓰는 사람이 되어야 수강생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강사가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렇게 황금기가 끝나면 다시 아이의 방학과 함께 삼시 세끼를 책임지는 엄마로 돌아간다. 쌀을 씻으며 영화관에서 흘러나오던 OST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된장국에 넣을 야채를 손질하며 저번에 갔던 서점에서 눈여겨봤던 책을 주문할까 고민한다. 언제나 해오던 일이지만 이제는 그 안에 ‘나만 아는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황금기 동안 마음껏 놀았기 때문에 살림이 지겹지가 않다.
나를 워킹맘이라 부를 수 있을까? 비시즌이 더 긴 나의 일은 누군가에겐 ‘용돈 벌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것, 그 균형을 유지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양가의 도움 없이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도움을 받을 수도, 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양육과 일을 균형 있게 맞춰나가는 것이다. 계좌로 들어오는 강의료가 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정도의 액수일지라도, 그 안엔 나의 시간과 애쓰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드라마 <폭싹 속았어요>에서 주인공 애순은 이렇게 말한다.
“근데 나 사실은, 신나서 가는 거야. 가면 나보고 다 애순이 선생님이래. 말하자면 내가 지금 인생, 엄청 승진한 거잖아... 나이 일흔에 선생님 소릴 다 듣고, 이제 '오애순 시인'까지.”
나는 이 대사를 듣고 마음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앞으로 내게도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늘고 길게 그 순간들을 어르고 달래며 가기로 했다. 오십이 넘어서는 내가 번 돈으로 여행도 가고, 철마다 남편에게 옷 선물도 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비시즌은 앞으로도 계속 자라고, 변하고, 단단해질 예정이다. 지금도 누리고 있는 이 비시즌이, 미래의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어줄 거라 믿는다.